[횡설수설/신성미]역사를 만드는 일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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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약하거나 외로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늘 도도하고 자신만만할 것.” 1983년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른 스물한 살의 조수미 씨는 일기장 첫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세계적인 성악가가 된 지금까지도 조 씨는 30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써 왔다고 한다. 그토록 자신감 넘치는 무대 뒤에는 기쁜 날이든 슬픈 날이든 일기를 매개로 꾸준히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 온 또 다른 조수미가 있었던 셈이다.

▷세계적인 문인들이 남긴 책의 상당수는 일기가 바탕이다. 1780년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쓴 ‘열하일기’는 기행문의 백미이자 조선 후기 사상과 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1786년부터 2년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쓴 일기는 ‘이탈리아 기행’의 모태가 됐고, 미국의 자연주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자연 속에서 자급자족하며 쓴 일기는 대표작 ‘월든’을 낳았다.

▷한 사람의 고독한 기록은 훗날 역사가 되기도 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대표적이다.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공식 문헌에서는 찾기 어려운 민중의 미시사(微視史)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조선시대 영남 사림이던 계암 김령(1577∼1641)은 죽기 전까지 39년간 꼬박꼬박 일기를 썼다. 최근 한국국학진흥원이 그의 일기 ‘계암일록’을 우리말로 처음 번역해 6권짜리 책으로 출간했다. 연암이나 충무공만큼 유명인은 아니지만 계암의 일기에는 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 같은 굵직한 사건과 정치적 소용돌이, 선비의 일상사, 고통받는 백성의 삶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요즘엔 초등학생을 제외하곤 일기 쓰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책 읽는 사람도 줄어드는 마당에 읽기보다 훨씬 공을 들여야 하는 일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꼭 종이로 된 일기장이 아니라도 PC로든 스마트폰으로든 매일의 단상을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아는가. 그 일기가 차곡차곡 쌓여 수백 년 뒤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될지.

신성미 문화부 기자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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