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가장 무서운 차는 뭘까. 경찰차? 미국 연수생이나 유학생들은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노란색 스쿨버스라고 이야기한다. 주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스쿨버스 관련 교통 벌점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특히 학생들의 승하차를 위해 멈춰 선 스쿨버스를 추월하면 엄격한 처벌을 받는다. 몇몇 주에서는 스쿨버스 운전사가 위반 차량에 직접 ‘딱지’를 발부할 수도 있다.
실제로 노란색 스쿨버스는 ‘움직이는 횡단보도’라고 불린다. 스쿨버스가 정차하면 진행 차로는 물론이고 반대 차로까지 가상의 횡단보도가 임시로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아이들이 스쿨버스에서 내려 반대 방향에 있는 집으로 건너갈 수도 있으므로 스쿨버스 주변 모든 차량이 보행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불만의 목소리도 있지만 내 아이의 안전을 위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는 게 미국인들이다.
우리는 어떨까. 아이들을 내려 주려고 정차한 통학차량을 향해 ‘빨리 가라’고 우악스럽게 경적을 울려 대는 운전자를 종종 목격한다. 통학차에서 내린 아이들이 추월 차량에 치일 뻔한 위험천만한 장면도 낯설지 않다. 보행자의 권리가 무시당하는 나라에 사는 우리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차 조심하라’라는 말을 수없이 들으며 자란다. 보행권보다 차량의 통행권이 우선되는 나라, 그게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더욱 분통이 터지는 것은 횡단보도에서조차 보행권이 위협받는 현실이다. 1일 서울시내 교차로 89곳에서 벌어진 일이다. 서울 경찰이 매주 1회 ‘교통질서 확립의 날’로 정하고 단속에 나선 첫날이었다. 이날 하루 동안의 단속 건수는 2374건으로 전날의 2254건보다 120건 늘었다. 평소 800여 명의 경찰을 투입하다가 이날은 특별히 4800명을 투입한 것을 감안하면 크게 늘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단속 내용을 보면 경찰이 어디에 방점을 두는지 알 수 있다. 경찰이 그동안 사실상 손놓고 있던 ‘횡단보도 보행자 횡단 방해’ 단속 건수가 1건에서 77건으로 대폭 늘었다. 계도 위주의 단속이어서 실제 위반 행위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벌점과 범칙금을 부과받은 반칙 운전자들은 대부분 “차가 횡단보도에 있는 게 불법인 줄 몰랐다”고 변명했다. 운전면허 시험을 치렀다면 이런 구차한 얘기를 할 수 없다.
1990년대 후반 개그맨 이경규의 ‘양심 냉장고’라는 인기 예능프로그램이 있었다. 당시 정지선을 지켜 냉장고를 받았던 사람들은 ‘법을 지켰을 뿐인데 냉장고까지 주니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만약 이 프로그램을 지금 다시 제작한다면 어떨까. ‘법 지키면 냉장고를 주는 나라’라고 웃고 넘길 수 있을까.
경찰은 6일 두 번째 단속에 나설 예정이다. 앞으로는 횡단보도가 원래 취지대로 보행자의 몫으로 제자리를 찾게 됐으면 한다. 이건 양심의 문제가 아니다. 경찰이 있든, 없든 횡단보도에선 보행자의 권리가 우선된다는 ‘상식’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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