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 잡다 칼에 맞아 죽어도 영광, 나는 대한민국 여경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6일 03시 00분


[新 여성시대]2부 전문직<7>여경찰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한국에 여경이 등장한 것은 광복 직후인 1946년. 미 군정청 경무부 공안국에 여자경찰과가 생기면서다. 첫해 여경 80여 명을 선발한 이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은 주로 수사부서보다는 내근에 배치됐다. 1990년대 들어서야 수사, 정보, 강력 등으로 진출 분야가 넓어졌다. 2년 전 여성 최초의 강력계장이 등장하더니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올해 4월 경찰대학장에도 여성(이금형 학장)이 임명됐다.

하지만 현업에서는 아직도 “유리천장은 깨지지 않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형사나 특공대원처럼 남성과 똑같은 체력을 요구하는 곳에서 일하는 여성이 늘긴 했지만 결혼과 육아 등의 문제에 부닥치면 이내 ‘형사’의 길에서 내근직으로 발을 돌리는 사례가 많다.

기자는 ‘유리천장을 뚫고 맹활약하는 여형사’를 찾기 위해 몇 주간 서울시내 경찰서를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서도 ‘강력계 형사’로 일하는 여경을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나마 현업에서 인정받는다는 여형사는 대부분 미혼이었다.

○ “죽어도 좋아”

‘민중의 지팡이’를 자처하며 경찰의 길을 선택한 여경들의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다. 남성들의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젊음을 바쳤던 ‘선배 여경’들은 후배 여경들의 의식부터 바뀌어야 유리천장을 뚫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강력계 형사를 15년 넘게 한 김성순 중랑경찰서 실종수사전담 팀장(43·여)은 “단순히 공무원이 되려고 경찰이 된 사람은 형사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경찰 조직 내에는 다양한 분야가 있으니 각자 적성에 맞는 부서를 찾아가면 된다. 하지만 김 팀장은 “갈수록 형사를 하겠다는 여경 후배가 적어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가족이 알면 큰일 날 생각이지만 (나는) ‘범인 잡다 칼에 맞아 죽어도 영광스럽다’는 각오로 일했다”고 말했다.

경찰 생활 3년차인 이은정 대원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2011년 서울 특공대에 배치받은 후 처음 투입된 ‘임신부 인질 사건’을 잊지 못한다. 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 그녀의 머리는 ‘정말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라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얼마나 떨렸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큰 사건을 무사히 끝내고 지금까지 특공대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 대원은 “내가 원해서 택한 길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업무 시간 외에도 체력단련에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일선 경찰서로 자리를 옮기더라도 강력 등 형사부서에서 일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장에서 여경이 가진 한계에 대한 지적이 나오기도 하지만 여전히 ‘여경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존재한다. 특히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 진술을 받거나 각종 잠입 수사를 진행해야 할 때다.

박지숙 광진서 형사(28·여)는 “마사지 업소에서 일하고 싶다”며 성매매 업주에게 위장 접근해 업주의 체포를 돕기도 했다. 아내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박 형사의 남편은 “다시는 위험한 일에 손대지 마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하지만 박 형사는 “내가 여경으로서 일을 해냈다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다”고 말한다. 현재 그녀는 실종팀에서 일하고 있다. 가출 청소년이나 실종자들은 남자 형사의 전화에 경계심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는 여형사가 일을 담당하는 것이 더 유리할 수 있다는 게 박 형사의 생각이다.

○ “우리만 고생”

“여경들은 조금만 잘해도 뉴스에 나올 정도로 스타가 되지? 그 뒤에서 고생하는 건 우리야!”

지난달 형사들과 기자들이 모인 한 술자리에서는 ‘스타 여경’의 뒤에서 일해 본 남자들의 애환이 쏟아졌다. 강력계 형사 김모 팀장은 “함께 일하는 여형사에게 남자처럼 일하길 기대하기는 힘들다”면서 “몸싸움을 해 범인을 잡거나 며칠 동안 차에서 잠복하는 게 다반사인 강력팀에서 여성은 짐 같은 존재”라는 말까지 했다.

성폭행을 당한 여성 피해자를 조사할 때처럼 여경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도 있다. “팀에 여경이 없으면 지원팀이나 전산실에서 인력을 끌어다 쓸 때도 있을 정도로 여경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가 있다”는 서울 소재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최모 경위의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역시 “팀에 여자가 있으면 그 한 사람만큼 인력 공백이 생기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강력팀 내에서 여경이 함께 근무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유리천장을 뚫고 승승장구하는 케이스에 대해서도 대체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강력계장 A 씨(남)는 “솔직히 신임 경찰대 총장이 여자로 발탁됐는데 ‘보여주기 식’ 인사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시내 한 경찰서에서 일하는 이모 경감도 “여전히 강력과 형사는 금녀의 벽이 높다”면서 “여자들이 버티기 힘든 곳이다. 살아남는다면 당연히 승승장구하겠지만 버티지 못하면 금방 도태될 것”이라고 말했다.

○ “우리도 같이 고생”

이런 남성 동료들의 ‘비판적’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박미옥 강남경찰서 계장(45)은 “정말 여형사와 오래 일해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며 코웃음을 쳤다. 박 계장도 남성 동료들의 이런 불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강력팀장으로 발령받았을 당시 잠복근무하는 차 안에서 “여자가 잘하면 뭐 얼마나 잘한다고”라며 면전에서 빈정대는 형사도 있었다고 한다.

박 계장은 그럴 때마다 “결과로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주위의 비아냥거림을 참아냈다. 그녀는 ‘서남부 살인의 추억’이라고 불린 정남규 특별 수사, 의사 남편이 만삭 아내를 살인했던 사건 수사 등을 진두지휘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서울 경찰특공대에서 일하는 이은정 순경(29)은 여성임에도 “여경에게 특별대우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 순경은 평소 검은색 전투복을 입고, 선배를 만나면 ‘특공’이라고 외치며 경례를 한다. 오전에 무술, 오후에 사격 등을 훈련하다 보면 하루가 간다. 군대식 말투와 행동에 익숙한 그녀는 “이곳은 대테러 훈련을 하는 곳이다. 나약한 모습은 절대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순경의 남자친구는 같은 훈련소 특공대원이다. 직장에서는 결혼을 앞둔 남자친구에게조차 ‘여자’가 아닌 ‘동료 경찰’이다. 그녀는 “데이트를 할 때마다 남자친구가 ‘이런 (애교 있고 여성스러운) 모습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라며 놀라곤 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일부 여경은 “아직도 유리천장이 깨지려면 멀었다”고 말한다.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 이상 개인적인 노력만 가지고는 여형사 생활을 버티기 힘들다는 것이다.

2004년 순경 공채로 들어와 자녀 둘을 둔 B 경장(36·여)은 강력계 형사로 일하다가 힘든 생활을 버티지 못해 형사지원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은 보안계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많은 여경이 당직이 잦아 육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집회시위가 벌어지면 시위대 측의 막무가내식 침입을 막기 위해 전략적으로 여경이 동원되기도 한다. 갑작스러운 현장 동원 업무가 발생하다 보니 ‘엄마’ 역할을 온전히 해내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두 자녀를 보살피려면 어린이집에 보내거나 육아도우미를 고용해야 한다. B 경장은 “경찰 박봉으로는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녀는 “남들은 공무원이니까 편하겠다고 하지만 경찰이 된 것을 후회했을 정도로 육아에 걸림돌이 된다”면서 “승진은 잊은 지 오래”라고 말했다.

남성들만의 무대라고 여겨지던 ‘형사’ 일에 뛰어든 여성들에게는 공통점이 엿보인다. 우선 자신이 경찰로서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선천적인 한계를 분명히 인정한다. 그 한계를 뒤에서 묵묵히 보완해주는 남성 경찰들의 도움과 가르침이 있었다는 점도 잊지 않았다.

이들의 대답을 듣다 보면 줄탁동기(啐啄同機)가 떠오른다. 달걀 속에 숨어 있던 생명체가 세상의 빛을 보기 위해서는 밖에서 껍데기를 깨뜨리는 어미 닭의 힘과 안쪽에서 껍데기를 쪼는 병아리의 노력이 합해져야 한다. 자신의 몫을 제대로 해내는 ‘여경’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여성 스스로의 노력과 남성 동료의 도움이 모두 필요하다는 말이다. 실종팀 형사인 박 씨는 “여자로서, 기혼자로서 형사 일을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동료 형사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 살아남을 수는 없다”며 함께 일하는 이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김수연 사회부 사건팀 기자 s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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