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다해 산밭 갈고 난 뒤에 나무 그루터기에서 외로이 우네. 어떻게 해야 개갈(介葛)을 만나서 네 뱃속의 말을 할 수 있을거나.
시인 정래교는 여항인(閭巷人)이다. 여항인이란 ‘조선시대에 벼슬하지 않은 일반 백성’이란다. ‘여염(閭閻)의 사람, 항간(巷間)의 사람’, 즉 오늘날의 민중, 서민 일반이다. 시재(詩才) 하나로 높은 공무원이 될 수 있었던, 시인에게는 참으로 바람직한 시절이었건만 신분사회라는 덫에 발목 잡혔을 테다. 그렇게 살아온 제 신세가 ‘힘 다해 산밭 갈고 난 뒤에/나무 그루터기에서 외로이’ 우는 늙은 소 같았을 테다.
오늘날 소개서나 이력서의 첫 칸을 명문가나 명문학교로 채울 수 없는 이들의 무력감과 비애가 떠오른다. ‘어떻게 해야 개갈을 만나서/네 뱃속의 말을 할 수 있을거나’ 개갈은 소와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는 전설의 나라 개국(介國)의 임금인 개갈로(介葛盧)를 말한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학벌도 인맥도 보지 않고, 오직 능력으로 사람을 뽑으면 좋으련만. 혹자는 능력 우선도 공정한 게 아니라고 하리라….
‘늙은 소’는 암소에게 새 생명을 주지 못할뿐더러 털이 거칠고 볼품없다지. 힘도 없을 테다. ‘늙은 말이 콩 더 달란다’고 이죽거리는 속담이 있는데, ‘늙은 소가 콩밭에 간다’도 같은 뜻이다. 평생을 실컷 부려먹었으면 그렇게 좋아한다는데 콩쯤 흔쾌히 줄 일이지. ‘늙은 소가 여물 맛 안다’는 속담은 늙은 소의 지혜와 연륜을 상찬하는 말 같기도 하고, 쓸모없으면서 식탐만 많다고 흉보는 말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이제 ‘늙은 소’는 멸종동물 아닌가? ‘늙은 닭’도 마찬가지고. 소도 닭도 늙도록 살 수 있는 세상은 사람도 ‘소, 닭 보듯이’ 평화로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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