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서울시 명예시민이 되었습니다. 한국과 서울을 위해 제대로 한 일도 없는데 송구스럽고 감사한 마음을 다시 한 번 전합니다. 제가 서울시 명예시민이 된 것에 대해, 일본 내에서는 심지어 저와 가까운 사람들조차 ‘복잡한’ 속내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제가 2012년 소녀상 앞에서 플루트로 ‘봉선화’를 연주하거나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인간의 죄의 역사’라고 언급한 것에 대해서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외교관이나 정치가도 아니고, 인류문화학자나 철학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있습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조선 침략을 계속 생각해왔다는 점입니다. 메이지유신 이후로도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탈출해 구미로 편입된다)’ ‘부국강병’ 같은 선전 문구를 강요하며, 적극적으로 조선 침략을 강행했습니다.
이런 것을 무시하거나 경시하고, 성실한 반성이나 사죄가 없었던 것이 현재 한일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든 원인이라고 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이 패전한 직후에도, 유독 조선인과 그들의 조국에 대해서만큼은 죄의식이 생기지 못했고,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도 전쟁 특수로 일본 경기가 살아나는 것을 오히려 더 기뻐했던 부분도 분명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나 동서 진영의 냉전, 그리고 6·25전쟁을 그저 과거 역사사건으로 넘겨버릴 수 있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러다 1968년 처음 한국을 방문해 서울 부산 춘천 제천을 찾아 갔을 때 큰 충격을 받고 말았습니다.
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일제강점기의 흔적들은 곳곳에 남아 있었고, 만났던 노인들은 여전히 그 시절의 아픔과 고통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제 가족들에게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1973년 첫 해외 가족여행으로 한국에 왔습니다. 제주도, 부산, 경주, 화성 제암리, 동인천, 서울, 춘천을 거쳤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를 냉대하기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제암리 교회의 아낙네는 먼 길 온 우리가 목이 마를까 설탕 탄 물을 정성스럽게 내놓기도 했습니다. 부족한 살림인 것 같은데, 저희에게 정성껏 방을 내주고, 밥을 지어준 분도 있습니다.
저의 딸과 아들은 종로 탑골공원에서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할아버지들이 일제 만행을 새긴 벽면을 가리키며 “여기를 잘 보거라”고 한 말에 깊은 인상과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본말을 강제로 배워야 했던 역사적 증인이 눈앞에 있었던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그 의미를 자신의 일로 느끼는가 그렇지 못하는가입니다.
어떤 입장이냐에 따라 세계는 전혀 다르게 흘러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는 가족과 함께 제암리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일어난 일본군의 학살을 먼 과거의 일이 아닌, ‘제 일’로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인식하고 나니 ‘그럼 나는 뭘 할 수 있지?’란 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도시산업선교회의 안내로 청계천 하류의 개미마을로 인도받았고, 급격한 도시 산업화로 고통을 받던 사람들을 미력이나마 돕게 된 것입니다.
정치인들 때문에 한일관계가 점점 나빠진다고들 합니다. 역사적 사실이 과거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지혜를 모았으면 합니다. 진심으로 한국, 북한, 그리고 일본 민중들의 화합과 우애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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