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은 파리특파원 시절인 1995년 3월에 경험한 김영삼 대통령의 방불(訪佛)을 회상하게 한다. 당시 김 대통령의 차량 행렬이 지나는 파리 시내에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던 아들과 딸을 데리고 나가 태극기를 흔들었다. 교민 유학생과 함께 김 대통령을 향해 박수를 치며 “외국에 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18년 전 경험의 핵심은 안타까움이다. 프랑스 언론은 한국 대통령의 방문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업무상 열독해야 했던 르 몽드를 비롯해 어느 신문에도 김 대통령의 방문 기사는 실리지 않았다. 프랑스 TV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 대한 프랑스의 관심이 이 정도란 말인가. 허탈하고 섭섭했다. 하긴 말끔하게 차려입으면 “일본인이냐”, 좀 허술한 차림으로 나가면 “베트남에서 왔느냐”란 질문을 받던 시절이었다. 1년 뒤 대우가 프랑스 전자회사 톰슨멀티미디어를 인수하려 하자 “한국 기업이 어딜 감히…”라며 프랑스 여론이 들고 일어난 일도 있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프랑스 최대 신문인 르 피가로가 박 대통령을 인터뷰해 방문 당일 1면과 7면에 크게 보도했다. 프랑스 최고 권위지인 르 몽드와 24시간 뉴스방송도 관심을 보였다. 케이팝을 좋아하는 프랑스인들은 한국 드라마 파티를 준비해 박 대통령을 초청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이끌어냈을까. 주원인은 국력이다. 프랑스가 친근하게 다가온 것은 한국이 무시할 수 없는 상대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력이 예전 그대로라면 프랑스의 무관심도 여전했을 것이다. 프랑스 영국 벨기에로 이어지는 순방에서 환대를 받은 박 대통령이야말로 부쩍 성장한 국력의 덕을 본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과 유럽 사이에는 의견 대립이 팽팽한 현안도 없다. 박 대통령의 서유럽 순방은 성공이 보장된 여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정부는 해외순방 성과에 대한 지나친 자화자찬은 자제하길 바란다. 박 대통령이 성공적인 정상외교를 말하려면 자신만의 ‘플러스알파(+α)’를 만들어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국민은 협력할 준비가 된 정상들과 소소한 합의를 이루는 단계를 넘어 시각이 다르고 목표가 엇갈리는 외국 지도자들을 설득해 국익을 관철하는 대통령을 기대한다. 박 대통령에게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회담장으로 끌어내 경색을 풀 전략은 있는가. 북한 김정은은 어떻게 설득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구현할 것인가. 정부도 꼬여만 가는 대일(對日) 대북(對北) 관계를 제쳐두고 정상외교가 잘 진행되고 있다고 포장할 염치는 없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올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서 52위를 차지했다. 국력에 비하면 형편없이 낮은 순위다. 박 대통령이 취임 첫해 미국 중국 러시아는 물론이고 유럽과 동남아시아의 주요국까지 부지런히 찾았지만 아직은 국제적인 경쟁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박 대통령에게는 외국 국민과 지도자들이 높게 평가하는 장점이 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 한국을 전쟁의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으로 이끈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방문국의 영혼이 담긴 현지어를 구사해 감동을 이끌어내는 능력과 성의 등…. 치밀한 전략을 세워 높아진 국가 위상과 개인적 장점을 적절히 활용하면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날이 올 것이다. 박 대통령의 본격적인 정상외교는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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