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총장 후보자로 지명되어 인사청문회를 기다리고 있는 김진태 후보자에게 언론 종사자들이 처음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과의 관계를 물었을 때, 오래전 법무부 법무심의관실 소속 검사로 당시 장관이던 그분의 업무보좌를 한 일은 있지만 그 후 아무런 교류(交流)가 없는 사이라고 대답한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또 감사원장으로 임명된 황찬현 전 서울중앙지방법원장도 법원에 대한 국정감사 현장에서 의원들의 비슷한 질문에 알기는 하되 사적인 교류는 없는 사이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법조인들의 생리나 언어습관을 얼마쯤 알기 때문일까, 필자는 자연스럽게 그 답변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서 우연히 두 분이 공통적으로 쓴 법조인들 간의 ‘교류’란 과연 어떤 의미일 것인가에 관하여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물론 이런 경우 교제나 교유(交遊) 또는 단순히 인사 삼아 찾아뵙는다는 뜻에도 미치지 않는, 그 교류라는 중립적 단어가 법조인 사회의 한 특징을 역(逆)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도 동시에 하게 된다.
교류의 사전적 의미는 서로 주고받거나 뒤섞이어 흐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법관이나 검사는 원래 법과 정의 관념에 따라 독립적으로 업무 수행을 하는 자리이므로 직무상의 일과 무관하게 서로 교류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문 사례가 될 수밖에 없다. 변호사들의 경우에도 공직윤리법이나 변호사법에 따른 제한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전관예우에 대한 사회적 비난도 크므로 변호사들끼리라면 몰라도 판검사들과의 교류는 생각만큼 수월하거나 빈번하다고 볼 수가 없다. 또 법조인 사이의 교류라고 하더라도 취미나 봉사 또는 종교활동 등을 통한 의례적 접촉이거나 교수들이 주축인 학회 활동의 범주에 속하는 무색적인 것이라면 별다른 논란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업무상 거치게 되는 협의나 결재의 과정을 교류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결국 문제는 출신 학교나 지역 또는 특정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이는 경우나, 흔치는 않지만 퇴직이 예상되는 판검사를 특정 로펌이나 대기업에서 미리 점을 찍고 의도적으로 교류를 시도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앞의 경우는 비록 그 동기가 나쁘지 않다고 하더라도 자칫 이른바 떼거리 짓기 또는 일종의 파벌로 연결될 수 있는 위험성 때문일 것이고, 뒤의 경우는 그 자체가 바로 위장된 또는 잠재적 부패행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법조인이 대체로 오만한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든가, 보통의 국민 정서와는 거리가 먼 자기네들만의 세계에서 따로 머물고 있다는 세간의 오해도 그러한 나쁜 교류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법조인의 세계라고 하더라도 따뜻한 인품이나 공통된 인문학적 관심 등으로 특별한 이해관계 없이 담연(淡然)한 마음을 서로 열어놓는 인간관계도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다. 필자의 경우에도 검사의 직을 벗어던졌을 때 차분한 위로의 편지를 보내준 판사나, 새로 도입된 제도의 안착을 위하여 자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던 검사와 교수, 대학으로 옮겨 간 직후 헬렌 니어링이 쓴 책을 한번 읽어보라며 보내준 법조 후배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가지고 있다. 행정부에 몸담게 된 전직 법관의 초청으로 몇몇이 아무런 구애됨이 없이 만나 청담(淸談)을 나눈 일도 인상에 남는다. 물론 이런 교류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아무런 대가관계가 없으며 지연이나 학연과는 처음부터 무관할 수밖에 없다. 법치주의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밑바탕에 있음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비록 이런 맑은 교류, 착한 교류라고 할지라도 법조 관련 종사자의 경우라면 당연히 금기로 여기거나 백안시해야 할까.
법조인의 세계에서도 교류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삶의 방식이나 철학이 달라 굳이 교류를 이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교류를 해도 교류하는 것같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류가 없으면서도 늘 마음으로는 교류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비록 법조인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청연(淸緣)을 바탕으로 한 ‘착한 교류’라면 아직 우리 주변에 더 좀 있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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