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 칼럼]‘강제 징용’에 외교부가 침묵하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11일 03시 00분


일제의 강제징용 논란에 한국 정부는 “해결됐다” 밝혀와
기존 입장과 법원 판결의 괴리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 않고 일본 비난하는 게 효과 있을지
법만으로는 해결 어려운 문제… 양국 정부와 기업 함께 고민해야

심규선 논설위원실장
심규선 논설위원실장
지난주 일본 경제단체들이 한국 법원의 강제 징용 판결에 이의를 제기했다. 잇단 승소 판결을 직접 거론하지 않고 ‘경제관계를 우려한다’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강력한 항의로 보는 게 맞다. 한국에서는 일본 경제계가 우리 사법부를 압박한다, 정경분리(政經分離) 원칙을 깼다고 비난하지만 오래전부터 예상됐던 일이다. 타이밍을 재다 나온 성명이지 그냥 한번 해본 소리가 아니다.

지난해 5월 대법원은 국가 간에 체결한 한일청구권협정(1965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는 주목할 만한 판결을 내놓았다. 국내에서도 한국의 ‘사법 주권’을 회복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국가 간의 약속을 무시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7월 서울고법과 부산고법의 파기환송심, 이달 초 광주지법이 피징용자의 손을 들어준 것은 대법원의 달라진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일본 정부도 일본인이 미국과 소련을 상대로 한 소송(원폭 소송, 시베리아 억류 소송)과 수차례의 국회 답변을 통해 상당 기간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개인청구권도 소멸됐다고 입장을 크게 바꿨다. 처음에는 무시하던 일본 법원도 최근에는 정부의 바뀐 해석을 수용하고 있다. 다만 일본 최고재판소는 개인의 재판청구권은 소멸됐으나 개인이 보상받을 권리(실체적 청구권)는 살아 있으며, 채무자(기업)가 임의로 자발적인 대응(보상)을 하는 것은 막을 수 없다고 문을 열어 놨다(2007년 4월 27일). 일본도 ‘약점’이 있는 것이다.

약점은 우리에게도 있다. 한일청구권협상에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합의한 소위 8개 청구 항목에 ‘전쟁에 의한 피징용자의 피해에 대한 보상’이 분명히 들어 있다(합의의사록 2조 g항). 그리고 정부는 1966년과 1971년 한시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법에 따른 보상은 매우 부실했다.

‘한일회담 문서 공개 민관공동위원회’도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 문제는 아직 일본에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고 했으나 강제 징용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2005년 8월 26일). 당시 포괄적으로 언급한 ‘반(反)인도적 불법행위’에 들어가는 문제이니 모순이 없다고 주장하는 건 궁색하다. 그때 확실히 강제 동원 문제는 우리 정부가 책임지겠다고 공표했다. 2007년에 만든 ‘태평양전쟁전후국외강제동원희생자지원법’이 증명한다.

우리 외교부도 일관되게 강제 징용 문제는 더이상 일본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밝혀왔다. 외교부가 이번 논란에 침묵하는 이유다. 곤혹스러워서다. 그런 외교부에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하거나 대법원 판결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은 ‘자기 부정’을 하라는 것과 같다. 아무리 욕을 해도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과거 한국 정부의 행위를 무시하거나 의미를 깎아내릴 수는 있다. 그러나 수천, 수만 쪽의 자료를 제 집 안방에서 검색할 수 있는 세상에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강제 징용 논란은 과거사, 독도, 군 위안부 문제와는 다르다는 걸, 누군가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정도는 돼야 우리에게 명분이 있는 문제는 더 강하게 주장할 수 있다.

한국 사법부는 독립적으로 판결할 수 있다. 대법원 판결을 얻어내기까지 피해 당사자와 조력그룹이 기울여온 노력도 의미가 크다. 그렇지만 일본에 한국의 사법부와 외교부는 모두 한국 정부다. 올해 말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온다면, 한국 내 일본 기업을 상대로 ‘강제 집행’을 할지가 최대의 관심거리다. 이번 논란의 가장 큰 파고는 아직 오지 않은 셈이다.

법을 떠나 이 문제는 일본 정부나 기업이 해결에 나서면 될 일이다. 한일 양국 정부와 징용자를 고용했던 일본 기업 및 한일청구권 자금의 혜택을 본 한국 기업들이 ‘2+2 재단’을 만들어 보상하자는 대한변호사협회 일제피해자특별위원회 위원장 최봉태 변호사의 제안이 솔깃하다. 이 제안은 독일 정부와 독일 기업이 공동으로 ‘기억·책임·미래’ 재단을 만들어 강제 동원 피해자를 도왔던 것을 본뜬 것으로, 대한변협과 일본변호사연합회가 2010년 12월 도쿄에서 채택한 공동선언에도 언급돼 있다.

피해자들이 이 방안을 수용할지 알 수 없다. 양국 정부나 기업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불분명하다. 지금 분위기라면 일본 측은 부정적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 하고 파국을 맞을 것인가. 끝이 안 보이는 한일 갈등에 현자(賢者)의 부재를 한탄하는 요즘이다.

심규선 논설위원실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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