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지 반년이 흐른 1998년 중반 경제부처의 한 차관급 인사는 호남 출신 장관으로부터 산하단체의 기관장으로 가라는 제의를 받았다. 김영삼 정부 때 승승장구했던 공직에 미련이 남아 있던 데다 산하기관장이 차관급과도 격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장관의 제의를 거절했다. 하지만 실세 장관의 제안을 뿌리친 게 영 마음에 걸렸다. 며칠 고민한 끝에 “산하기관장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지만 지나간 버스에 손 흔든 격이었다. 다른 사람이 내정됐다는 것이다.
얼마 뒤 그의 사무실에 검찰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샅샅이 뒤져도 비리를 잡지 못하자 검찰은 여비서에게 자주 연락하는 기업인을 캐물었다고 한다. 결국 4개 회사에서 떡값으로 3000여만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1심에서 실형을, 2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풀려났지만 공직을 떠나야 했다. 관가에서는 ‘괘씸죄’라는 뒷말이 무성했다. YS에서 DJ로 정권이 교체된 직후 청와대 기류를 읽지 못한 것을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최근 이석채 KT 회장과 정준양 포스코 회장의 사의 표명과 관련해 15년 전 이 일이 떠올랐다. 이명박 정부 때 선임된 두 사람은 새누리당의 정권 재창출로 연임한 임기를 마칠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랬다면 오산이었다. TK 출신인 이 회장은 YS 정부에서 정보통신부 장관과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을 지냈다. 정권이 바뀌어 DJ 정부 후반인 2001년에는 개인휴대통신(PCS)사업자 선정 비리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곤욕을 치렀다.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기까지 꼬박 5년이 걸렸다. 그는 최근 검찰이 KT 본사와 자신의 집까지 뒤지면서 전방위적으로 압박하자 사표를 던졌다.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10여 년 전처럼 다시 법정에서 싸워야 할 처지에 몰렸다.
검찰이 수사 중인 이 회장의 배임 여부는 법원이 가릴 것이다. 정 회장 사퇴도 시간문제인 듯하다. 지금도 세무조사를 받고 있는데 더 버티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MB 정부 때 계열사를 줄줄이 늘린 포스코는 ‘영포 라인’들이 요직을 차지했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그동안 많이 누렸으니 이제는 좀 물러나시라”는 게 청와대의 속내가 아닌지 모르겠다. 민영화한 KT와 포스코가 권력의 전리품 취급을 받는 것은 회사뿐 아니라 나라 전체로도 안타까운 일이다.
KT 자회사가 55개, 포스코는 100개가 넘는다. 대선 공신들이 아직도 자리를 주지 않느냐고 아우성이니 권력으로선 구정권의 사람들을 그대로 두기 어려울 것이다. 검찰과 국세청이 샅샅이 뒤지는 판국에 회장의 말이 먹힐 리 만무하다. 임원들은 업무보다는 새 권력에 줄 대기 바쁘고 책임지기 싫어하는 직원들은 복지부동이다. 중요한 의사결정은 뒤로 미뤄져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두 회장은 지금 권력의 염량세태(炎凉世態)를 피부로 느낄 것이다.
선거가 끝난 지 1년이 다 돼 가는데도 새누리당은 아직도 친박(親朴)과 친이(親李)의 편가르기가 계속되고 있다. 4대강 한식세계화 원전사업은 검찰과 감사원 손에 단죄됐고, 녹색성장과 보금자리는 관가에서 터부시하는 용어가 됐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박명재 의원처럼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 있는 사람은 쓸지언정 MB 곁에 있던 사람은 싫다는 뜻인가. 한 지붕 아래서 내 편이 아니라며 배척하는 뺄셈의 정치로는 국민 대통합은커녕 당 화합도 이루기 어렵다. 사면초가인 두 회장의 처지를 보면서 혹시라도 두 대통령에 양 다리를 걸쳤다는 책임을 지금 묻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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