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만약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혹은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친 한 마리 울새를 둥지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극과 극은 통한다 했던가. 꽉 짜인 틀을 지키며 반듯하게 살아가는 수녀와 틀을 뛰쳐나와 멋대로 사는 예술가의 만남이 그랬다. 이해인 수녀와 화가 김점선(1946∼2009), 둘은 요즘 말로 ‘절친’이었다. 이해인 수녀는 먼저 떠난 벗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들려준다. ‘오늘은 나도/이상하게 기운이 없는데/힘내!라고/말해줄래요?/언제 우리/다시 만날 그날까지/그대가 좋아하는 맨드라미꽃 열심히 그리며/기쁘게 지내세요/심심해하지 말고-’(‘김점선에게’)
신발에 꽃을 꽂고 다니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뜨겁게 울던 김 화백은 삶도 예술도 자유롭고 파격적이었다. 주변에서 ‘한 사람쯤 없어선 안 되지만, 둘이 있어서는 좀 곤란한 사람’이라고 그를 평한 이유다. 고 박완서 씨는 생전에 “아무도 그 여자를 길들이지 못한다. 그 여자는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으니까”라고 말했다. 지금 서울 남산의 ‘문학의 집·서울’에서 그의 4주기 추모행사로 ‘문인들이 사랑한 화가-김점선’전이 열리고 있다. 얼마 전 작고한 최인호 씨를 비롯해 이해인 수녀, 시인 권용태, 사진가 김중만 등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김점선기념사업회가 마련한 행사다.
김 화백을 생각하면 영문학자이자 수필가인 고 장영희 씨의 이름이 떠오른다. 이해인 수녀와 더불어 3총사처럼 지냈던 사이다. 장 씨는 미국의 여성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사랑했다. 디킨슨 시를 강의노트에도, 직접 만든 머그잔에도 적어 넣었을 정도였고, 특히 ‘만약 내가…’를 아꼈다 한다. “내 옆자리에 남이 설 자리도 좀 내주고 넘어진 사람도 함께 손잡아 일으켜 우리 모두 함께 길을 걸어가고 함께 길을 찾아가기”를 꿈꾸던 자신의 마음을 대변했기 때문일까.
각박한 세상 속 한국인은 기댈 곳이 없나 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3 삶 보고서’는 씁쓸하다. ‘어려움에 빠졌을 때 의지할 친구나 친척이 있는가’란 질문에 한국은 34개국 중 꼴찌에서 3번째로 낮은 사회적 유대감을 드러냈다. ‘우리’라는 말을 지구상에서 제일 많이 입에 달고 사는 우리의 현주소다. 아등바등 달려와 먹고사는 문제는 웬만큼 해결했으나 속마음은 헛헛한 것인가.
공포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은 무서움을 느끼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독자가 감정이입할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라 말한다. 위험에 빠진 주인공을 보며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인간의 위대한 본성인 공감 능력 때문이란 것이다. 요즘 태풍 피해를 본 필리핀 돕기 운동이 한창이다. 남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하는 것, 지친 새를 다시 둥지에 보내주는 것은 우리 삶을 헛되지 않게 만드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일이다. 나의 숨은 상처를 누군가 어루만져 주기를 기대하기 전에, 나는 누군가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인가 곰곰 자문해 봐야겠다. 먼 곳도 좋지만 이왕이면 가까운 곳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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