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 추계에 따르면 2013년 부부로만 구성된 고령(65세 이상) 가구는 111만8500가구(총 가구 중 6.3%)에 달한다. 2035년에는 291만9000가구(13.1%)로 늘어난다. 고령 부부가 늘어날수록 한쪽 배우자가 병에 걸리면 간병은 고스란히 나머지 배우자의 몫이 된다. 오랜 간병에 지쳐 배우자를 살해했다는 뉴스가 사회면에 등장한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노노(老老) 간병 문제는 이제 개인 가족사의 문제가 아닌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파킨슨병에 걸린 아내가 올해 1월 사망할 때까지 10년 세월을 곁에서 돌본 김석규 전 주일 대사(77)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대단하다” “얼마나 고생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훗날 그런 일을 당하면 어떤 결정을 내릴까”란 두려운 질문도 떠올랐다.
2004년 겨울 어느날 찾아온 불치병
13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김 전 대사의 집에 들어서자 거실 한구석에 큰 가구를 밀고 옮길 때 생긴 희미한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그의 아내가 마지막 연명치료를 집에서 받을 때 누워 있던 침상이 있던 자리다. 김 전 대사에게 아내가 처음 발병했을 때 이야기를 물었다.
“어느 날, 몸이 아프다고 투덜대기 시작했습니다. 2003년 초부터는 글씨가 잘 안 써진다고 하더니 글씨 크기도 점점 작아졌어요. 급기야 오른손 손가락에 마비가 오더니 가만히 있을 때도 손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내 송혜옥 씨는 2004년 1월 26일,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이 병은 당장 위험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진행 기간이 길면서 점점 상태가 나빠지기 때문에 당사자도 그렇지만 옆에서 이를 지켜봐야 하는 가족들의 고통도 크다. 우선 몸 움직임이 더뎌져 균형을 못 잡는다. 심해지면 화장실에 갈 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나중에는 식사마저 혼자 할 수 없게 되고 입술이 마비되어 말도 못하게 된다. 인지능력이 떨어지면서 치매를 함께 앓을 가능성도 높다. 결국 김 전 대사의 아내도 죽기 2년 전부터 식물인간처럼 침대에 누워 인공호흡기에 의존하여 연명치료를 받았다.
“7년여 간병이 끝난 순간이었지요. 병원 치료를 끝내고 죽음을 기다리는, 식물인간 상태가 됐습니다. 오랜 시간 저를 힘들게 했던 육체적 간병에서는 해방됐지만 ‘슬픈 자유’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러 의료기기들을 설치해야 했기 때문에 아내 침대는 거실에 두고 나는 침실에서 잤어요. 밤중에 인공호흡기에서 나오는 ‘쉭…쉭…’ 하는 소리가 마치 아내의 숨소리처럼 들렸지요.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을 이루지 못해 밤중에도 깨어 있는 시간이 많았지요. 그럴 때엔 인터넷 사이트에서 파킨슨병에 관한 자료를 찾기도 하고, 일기를 쓰기도 했습니다. ‘슬프다’ ‘외롭다’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살아있어 좋다’ 이런 감정을 아무렇게나 적는 일이 고통을 잊는 유일한 약이었지요.”
―임종은 하셨나요.
“올해 1월 18일로 기억하는데 체온이 갑자기 올라갔어요. 병원에서 해열제를 먹이라고 해 먹였더니 아침에 열이 내려 있더라고요. 안도한 것도 잠시, 열이 자꾸 내려가는 거예요. 호흡기를 보니 숨은 계속 쉬는 듯했는데 어딘가 이상했어요. 전엔 펼 수가 없을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이게 다 펴져 있는 거예요. 체온을 재보니 34도야. 사람이 죽으면 발끝부터 체온이 떨어진다더군요. 그것도 모르고 나는 머리랑 이마만 계속 만지니까 체온이 남아 있어서 죽은 줄도 몰랐어요. 빨리 병원으로 옮겨서 응급치료를 받자는 생각에 구급차를 불렀는데,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경찰에 신고를 했고 사망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나도 펑펑 울고 아내도 펑펑 울고
그의 말이 잠시 끊겼다. 아픈 상처를 헤집었다는 생각에 기자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잠시 후 그는 “장례에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아내는 로봇처럼 살다가 유언도 못하고 떠났습니다. 죽음에 대비해 미리 준비해야 될 게 많아요. 유언뿐만이 아니에요. 부고는 어떻게 할지에서부터 챙겨야 할 서류들도 많아요. 예를 들어 검안서라고 있는데 장례식장부터 써야 할 곳이 많으니 10부 정도 넉넉하게 떼어 놓아야 해요. 그런데 이런 걸 가르쳐 주는 곳은 없잖아요.”
그는 아내 생전에 아들에게 ‘어머니 유고 시 조치사항’이란 제목으로 문서를 만들어 놓았다가 자신이 지쳐 가면서 혹여 아내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까 무서운 마음이 들어 ‘부모 유고 시 조치사항’으로 바꿔 놓았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그는 난데없이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영화 ‘아무르’ 보셨어요? 뇌중풍이 온 아내를 간병하던 남편이 결국 아내를 베개로 눌러 질식시켜 죽인 뒤 자신도 가스로 자살하는 노부부 이야기를 다룬 거예요. 지난해 12월에 이 영화를 봤는데, 영화 보는 내내 부부의 사랑을 그린 로맨틱한 내용보다는 남자 주인공이 아내를 간병하는 방법과 멀쩡하던 여자 주인공이 점점 변해가는 증세를 꼼꼼하게 봤죠. 아내 입에 식사를 떠먹이고 몸을 들어 침대에 눕히고….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맞아, 저때 내 아내도 저런 반응이었지’ 하는 공감을 많이 했습니다.”
기자는 조심스럽게 “남자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김 전 대사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갑자기 만세 부르듯 두 팔을 위로 곧게 펼치며 이렇게 외쳤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처럼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고) 난 해냈어. 나는 최선을 다했어! 이런 마음이었죠.”
기자와 김 전 대사 모두 쓸쓸하게 웃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몇 해 전, 밤에 아내를 화장실에 데려가려고 안다가 발을 헛디뎠어요. 아내가 먼저 바닥에 떨어지면 안 된단 생각에 순간적으로 제가 아래로 먼저 깔리려고 몸을 날렸지요. 그렇게 바닥에 누운 순간 그 밤중에 갑자기 눈물이 나서 저도 펑펑 울고 아내도 펑펑 울었습니다. 간병이란 게 그래요. 집안에 사람이 아프면 손님을 집에 데리고 올 수도 없고, 저 역시 외부 약속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인터넷을 찾아보니 외국에도 저처럼 아내 간병하는 남편들이 있더군요. 14년간 파킨슨병에 걸린 아내를 돌보는 60대 중반의 남편이 간병의 고통을 호소하면서 ‘(아내 곁에) 머물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다(can't stay, can't leave)’고 말했는데 정말 공감이 가더군요.”
―도망치고 싶을 땐 없었나요.
“도스토옙스키 평전을 보니 생전에 작가가 바람을 많이 피워 마누라 고생을 많이 시켰더군요. 그런데 마누라가 아프니까 오랫동안 병상을 지키죠. 평전에서는 그 감정을 사랑이 아니라 연민(compassion)으로 해석하더라고요. 내겐 사랑도 있고 자식들에 대한 배려도 있었죠.”
증상 매일 기록… ‘파킨슨병’ 책 발간
―배려라뇨?
“내가 이 병상을 지키지 못하면 바쁜 자식들이 와서 지키지는 못할 것이고, 설사 한다 해도 장시간 할 수는 없을 텐데 자식들에게 짐을 지우면 불효자 소리를 들을 거 아니겠어요. 그걸 내가 막아주겠다는 생각이요. 물론 이런 감정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어요.”
그는 지난 10년 동안 아내의 증상을 매일 기록하고 병을 공부하면서 파킨슨병 전문가가 됐다.
“처음부터 기록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1시간씩 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가까스로 진료실에 들어가면 의사는 ‘어떠세요?’ 모니터만 보다 5분 만에 진료를 끝냅니다. 의료진의 애로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한 번 병원 진료를 위해 직장을 휴가 내고 나온 아들과 둘이서 몇 시간씩 걸려 병원에 부축하고 갔는데…. 의사에게 묻고 싶은 건 태산 같고. 그래서 생각 끝에 아내의 증세를 효율적으로 2, 3분 안에 의료진에게 전하기 위해 압축식으로 메모를 만들어 갔습니다. 지금 어떤 상태인지, 매일 상태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고 무슨 약을 먹였는지 꼼꼼하게 기록해 의사에게 보여 준 거죠.”
간병 10년은 사랑, 연민, 배려…
그렇게 모은 기록들을 바탕으로 최근 ‘파킨슨병 아내 곁에서’란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자신처럼 처음 간병을 해야 되는 사람들이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쓴 책이다.
“어느 날 책을 보았다면서 70세 사업가라고 하는 분이 전화를 했어요. 책에 언급된 ‘환자가 누르는 호출기’를 어디서 사면 되느냐는 거였죠. 자신도 아내가 발병을 해서 일을 줄이고 간호를 해야 한다면서 말이죠. 막상 간병을 시작해보면 간병인 구하는 일에서부터 모르는 것투성이거든요.”
응접실 벽에 김 전 대사 아내의 젊을 적 사진이 걸려 있었다.
“2000년 4월 제 은퇴를 앞두고 아내가 무척 설레어 했지요. 젊은 시절 임지였던 스페인 마드리드를 꼭 여행하자고 약속했었는데 결국 꿈이 되어 버렸습니다. 올 1월 장례를 마치고 5월에, 혼자 43년 만에 마드리드를 찾았습니다. 흘러온 시간을 역주행한 느낌이었어요.”
인터뷰를 마친 뒤 집을 찬찬히 둘러보니 그의 아내가 남편의 임지를 다니며 하나씩 사 모은 듯한 조그만 장식품들이 놓여있었다. 예뻤던 새색시는 그렇게 하나하나 보금자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김 전 대사는 아내의 마지막을 지켰던 시간을 ‘사랑, 연민, 도덕, 의무감 그 외의 복합적인 감정의 화합물’이라고 했다. 그 오묘한 감정은, 오랜 시간 부대껴 살아온 부부애(愛)가 아닐까, 기자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 김석규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1959년 외무고시 합격. 주미 대사관 참사관 미주국장, 외교안보연구원장을 역임했고, 주파라과이 대사, 주이탈리아 대사, 주러시아 대사를 거쳐 2000년 주일본 대사를 마지막으로 외교관 생활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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