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83>정릉 산보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18일 03시 00분


정릉 산보
―최동호(1948∼)

새벽 언덕길,
사지가 굳어 거동이 불편한 아들에게 아침체조를 가
르치는 젊은 어머니가 있다

좁은 산길,
중학생 영어를 암기하다 얼른 등 뒤에 책을 감추고
내려오는 중년여성이 있다

봄 언덕길,
꽃아 예쁘다 새야 반갑다 손뼉 쳐 햇빛 가르며 올라
가는 꼬부랑 할머니가 있다

점심 산보길,
소풍 온 유치원 아이들 새처럼 포르르 날아오르는 노
랫소리가 있다

저녁 산보길,
빛나던 대낮의 햇살들 다 서풍에 실어 보낸 나뭇잎들
이 실개천에서 반짝이며 놀던 물비늘 찾아오라고 초
저녁 하늘 멀리 있는 별들을 부르고 있다


지금 그 정릉 길, 간밤에 우르릉 쾅쾅 천둥 울리고 비바람 몰아쳤으니, 소나기로 쏟아져 내린 빨강 노랑 단풍잎들로 뒤덮여 있겠다. 북한산으로 이어질 그 길에는 아웃도어 패션으로 차려 입은 사람들도 약수통을 짊어진 이들도 지나가련만, 화자의 마음에는 ‘거동이 불편한 아들에게 아침체조를 가르치는 젊은 어머니’, 좁은 산길을 걸으면서 ‘중학생 영어를 암기하다 얼른 등 뒤에 책을 감추고 내려오는 중년여성’, 새로 맞이한 봄볕을 잡으려는 듯 짝짝! 손바닥을 부딪치며 꽃도 반기고 새도 반기는 꼬부랑 할머니가 새겨진다.

시 속의 젊은 어머니와 중년여성과 꼬부랑 할머니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기만의 삶을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원래는 길이 없던 곳인데 여러 사람이 자주 오가서 생긴, 조촐한 숲이나 들판의 작은 오솔길을 ‘disire line(희망선)’이라고 한단다. ‘정릉 산보’는 몸의 산책일 뿐 아니라 가슴의 산책이기도 하다.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외로이 분투하는 이들을 향한 화자의 눈길, 화자의 발걸음을 따라 길이 나누나. 고립된 채 겨울을 보내기 쉬울, 노숙인이나 동네 불우이웃에 대해 그저 한 번, 생각이라도 해본다.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시내버스를 타고, 낙엽도 아름다울 정릉 숲에 가서 거닐어 보련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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