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기를 만들고 따라 배우게 하는 것은 북한의 고전적 선전선동 방식이다. 북한군도 예외가 아니다. 김일성 시대에는 경기 파주시 진동면 맞은편 해발 200여 m의 ‘대덕산 초소’가 본보기가 됐다. 1963년 2월 이곳을 찾은 김일성은 한 명이 백 명을 당하라는 뜻으로 ‘일당백’이란 구호를 제시했다. ‘일당백’은 지금까지도 북한군의 훈련구호다.
김정일 시대에는 평양고사포병부대 122여단 산하의 대공포 중대가 ‘다박솔 초소’란 이름으로 시대의 상징이 됐다. 다박솔은 초소 주변에 작은 소나무가 우거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인데 이 소나무들은 김정일 시찰 몇 달 전 주변 군인들이 총동원돼 심은 것이다. 언 땅을 파고 큰 나무를 심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작은 소나무들을 심을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은 1995년 설날 김일성 시대 매년 해오던 신년사를 하지 않고 이 초소를 찾았다. 북한은 이날을 선군정치의 시작일로 정하고 있는데, 사실 선군정치란 말은 2년 뒤부터 등장한다. 김정일 스스로도 “선군은 군사독재가 연상되기 때문에 쓰기를 망설였다”고 고백했다 한다.
김정은 시대에는 2010년 11월 연평도를 포격했던 무도(茂島)가 대덕산 초소와 다박솔 초소의 뒤를 이어 새로운 군 영도의 본보기로 등장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일당백이나 선군정치와 같은 용어가 나오진 않았지만, 머지않아 김정은이 허름한 목선을 타고 무도와 장재도를 방문했던 지난해 8월 17일이 상징적인 날로 지정될 것이 분명하다.
김정은은 올해 3월과 9월에도 이곳을 방문했다. 1년 남짓 기간에 세 번이나 찾은 것이다.
김정은은 무도 방어대에 영웅방어대라는 칭호도 내렸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당시 우리 군은 강령군 개머리 진지에서 최초로 날아온 방사포탄이 무도에서 발사된 것으로 착각하고 이곳 해안포대에 포격을 퍼부었다. 공격을 받은 무도 해안포도 2차 포격에 참가했는데, 명중률이 보잘 것 없었던 방사포와는 달리 무도의 해안포대는 반세기 가까이 연평도와 대치해 온 ‘내공’ 덕분인지 비교적 포격이 정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전투력과는 별개로 무도의 병사들은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었다. 김정은이 최초로 방문해 병사들과 찍은 기념사진에는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한 병사들이 적잖게 눈에 띄었다. 요즘 북한군 전방부대는 물자공급이 제일 잘 되지 않아 가난한 노동자 농민의 자녀들이 가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다.
섬을 방문한 김정은은 한심한 실태에 화가 나 그 자리에서 현영철 총참모장을 중대장으로, 전창복 후방총국장은 중대 사관장으로 한 달 동안 근무하라고 지시했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은 체면을 봐줘서 대신 총정치국 부국장이 중대 정치지도원으로 한 달 근무했다. 우리 정보망에서 북한군 총참모장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했을 때 그는 전방 해안포 중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듬해 3월까지 무도와 장재도에는 군관들을 위한 현대적 주택들이 대거 건설돼 최영림 총리가 현지시찰까지 했다. 9월엔 김정은이 직접 방문해 새로 건설된 주택과 내무반을 둘러봤다. 병사들도 작년보다 살이 많이 쪘다. 김정은의 눈에 든 무도 방위대장은 대대장급에서 최소 중장급이 맡는 보직인 총정치국 부국장으로 벼락 승진했다.
2008년 8월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깨어난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제일 먼저 넘겨준 것은 군(軍)이었다. 2009년 초부터 북한군엔 청년대장의 영군체계를 세우라는 지시가 하달됐고 김정은이 직접 군 업무를 맡았다. 다행이라면 김정은은 아버지처럼 현실을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는 것 같다. 김정일 시대에는 군부대 시찰 시 영양실조 환자들과 건장한 병사들을 바꿔치기 하는 눈속임이 당연시됐다.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해 김정은은 며칠 시차를 두고 한 부대를 두 번 방문했다. 예고 없이 찾아간 두 번째 방문 때에는 앞선 시찰 때 건강한 병사들로 넘쳤던 내무반에 영양실조 환자들이 누워있었고, 식당에 가득했던 후방물자도 다 사라졌다. 김정일 시대처럼 여기고 김정은을 속이려던 간부들이 크게 혼이 났음은 물론이다.
식량난 탓에 최근 북한군 기강도 말이 아니다. 전방 부대의 경우 편제가 100명인 중대에서 70명만 유지하고 있어도 욕을 먹지 않는다. 없는 인원은 더러는 영양실조에 걸려 집에 치료받으러 갔고, 더러는 부대에 돈을 보내기로 하고 집에 가 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그렇게 보내온 돈으로 군관들이 먹고살고 부대 식생활에 보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때 배후자 선호도가 상위권이던 군관들 인기도 말이 아니다. 요즘엔 군관 하겠다는 사람도 줄고, 그렇다 보니 제대도 잘 시켜주지 않는다. 김정은은 최근 1년 동안 물자 공급에 큰 관심을 돌리고 탈영 통제도 심하게 하고 있지만 밑에선 “옛날보다 더 못살게 군다”고 불만이 많다.
지난달 평양에서 열린 중대장, 정치지도원 대회도 땅바닥에 떨어진 초급 지휘관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내년부턴 군에 농장 경작지를 분양해 식량을 자급자족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렇잖아도 화전농사에 내몰리던 군인들이 이제 전문 농사꾼이 되게 생겼다.
얼마 전 북한군 탱크부대 사관이 탈북한 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읽다 웃은 적이 있다. 다섯 쪽의 편지에는 올해 농사는 잘됐다는 둥, 내년엔 비료를 어디서 얻어야 한다는 둥 처음부터 끝까지 농사 이야기만 하다 끝났다. 하긴 군에서 하는 일이 그것밖에 없으니 농사 빼곤 할 이야기도 없었을 것이다.
남쪽에선 북한과 전쟁하면 누가 이기느냐에 관심이 크다. 하지만 북한군의 처지에서 봤을 때 그들의 현실적 주적은 한국이 아니라 굶주림이다. 이미 많은 병사들이 먹질 못해 전력에서 이탈했다. 우리가 ‘북한과 전쟁을 하면’이라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을 때 북한군은 이미 생사를 걸고 기아와의 전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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