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면서 모든 농산물에 대해 수량 제한이나 각종 비관세 조치를 관세로 전환해 시장을 개방하는 관세화 원칙을 추진했다. 당시 쌀 관세화를 유예했던 우리나라와 필리핀은 2004년 의무수입 물량을 늘리는 대가를 제공하고 쌀 관세화를 2차로 유예했다. 필리핀은 2012년 2차 유예기간이 종료됐고, 우리나라는 2014년 말까지 1년여 남아 있다.
필리핀은 3차 유예를 추진했지만 결과는 냉정했다. 협상 참여국들은 WTO 농업협정에 의한 쌀 관세화 유예는 한 번만 허용된다면서 유예를 반대했다. 필리핀은 현재 미국, 중국, 호주 등 9개국과 웨이버(waver·의무면제) 협상을 추진 중이다. ‘웨이버’는 회원국 중 하나라도 반대하면 허용되지 않는 까다로운 협상이다. 필리핀은 웨이버 협상 과정에서 쌀과 쌀 이외 품목에 대한 각종 요구에 시달리고 있다. 필리핀은 쌀 관련 추가 부담에 대해서는 추가 유예의 대가로 80만5000t의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하고, 의무수입 관세율도 현재보다 5%포인트 낮은 35%로 하기로 잠정 합의했다. 그러나 쌀 이외 품목의 관세 인하 등의 요구에는 합의점을 찾지 못해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필리핀이 추진하는 쌀 관세화 3차 유예 협상은 우리나라에도 시사점을 준다. 우리나라는 2015년 1월 1일부터 관세화하거나 웨이버 협상을 통해 관세화를 추가 유예할 수 있다. 웨이버의 경우 WTO의 모든 회원국을 협상 대상으로 해야 하며, 쌀과 쌀 이외의 품목에 대해 상당한 대가 지불이 불가피하다.
왜 필리핀은 상당한 부담에도 쌀 관세화를 추가로 유예하고자 할까? 필리핀은 연간 100만∼200만 t의 쌀을 수입하고 있다. 의무수입 물량을 현재의 35만 t에서 80만 t 수준으로 확대하더라도 연간 최대 수입 물량의 절반에도 못 미쳐 국내 생산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필리핀과 다르다. 쌀 관세화 유예로 인한 의무수입량 41만 t(2014년 말 기준) 외에는 수입되는 쌀이 없다. 의무수입을 2배 이상으로 확대할 경우 연간 쌀 생산량이 400만 t 수준인 우리 쌀 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우리나라가 필리핀처럼 웨이버를 통한 관세화 추가 유예를 추진할 경우, 회원국들은 한국의 경제 규모가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쌀뿐 아니라 쌀 이외의 품목에 대한 무리한 요구를 제기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도 쌀 관세화 유예기간 종료가 1년여 남았다. 필리핀의 사례를 곱씹으면서 식량안보의 기본인 쌀의 안정적 생산기반 확보라는 기본 가치하에 농업인, 소비자,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이성적인 판단과 결정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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