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어나서는 안 될 존재였다. 태어날 때는 ‘효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나 평생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외출을 해도 형들의 기세에 눌려 뒤꽁무니에 있다가 혼자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집안에 처박혀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잊을 만하면 ‘밥값 못하는 식충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럽고, 억울하고, 분했다.
2000년 8월 15일. 내가 태어난 날이다. 경상용차인 라보 승합차를 개조해 3.2m 길이로 만든 미니 소방차의 등장은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화재 진압 현장의 주역인 대형 소방차의 길이가 9.1m이므로 3분의 1 수준의 깜찍한 소방차였다. 몸집은 작아도 소방호스, 화학약품 등 화재 진압에 필요한 소방장비를 제법 갖췄다.
존재 이유는 분명했다. 제주지역의 골목을 누비며 화마(火魔)와 싸우는 것. 나는 당시 전국소방장비개발품평회에 나간 데 이어 특허출원까지 됐다. 내 동생들이 전국에 보급될 경우 대당 판매가의 10%를 특허 로열티로 받아 소방가족과 소년소녀가장을 돕는다는 원대한 목표도 세웠다.
내 이야기가 알려지자 여기저기서 미니 소방차를 도입하겠다고 나섰다. 나는 라보 승합차였지만 내 동생들은 1t 트럭을 개조한 미니 소방차로 개선이 됐다. 2002년부터 올해까지 모두 98대가 소방서에 배치됐다. 공무원들은 “골목 내 주택이나 상가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는 데 첨병 역할을 할 것”이라고 홍보해줬다.
그러나 아니었다. 나는 쓸모가 없었다. 물탱크가 작아 2, 3분이면 바닥이 났다. 소방관이 당황할 정도로 수압도 낮았다.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의원들의 질책을 받아야 했다. 미니 소방차가 배치된 소방서의 월평균 화재 발생 건수는 12.8회나 됐지만 미니 소방차가 출동한 건 3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배신감도 느꼈다. 서울시는 작년 초 ‘골목형 소방차를 도입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으면서도 나에 대해 좋지 않은 소식이 들리자 ‘미분무(微噴霧) 가스 소방차’라는 이름으로 서둘러 대체했다. 이름이 어떻든 나처럼 애물단지가 된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
결국 18일 나는 사실상 ‘용도 폐기’ 선고를 받았다. 그것도 우리를 보호해줄 거라고 기대했던 소방방재청으로부터. 나는 13년간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제주도소방교육대 유리창 안에 갇히게 됐다. 전시용으로 전락한 셈이다.
그렇지만 나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이건 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미니 소방차를 배치하는 데 38억 원이 들었고, 그게 모두 국민의 세금이었다는 점. 용인경전철의 예산 낭비 사례에 비하면 ‘새발의 피’지만 감시가 소홀하면 언제든 제2, 제3의 미니 소방차가 등장해 세금이 줄줄 샐 수 있다는 점. 이 모든 게 이상과 현실이 괴리된 어느 공무원 집단의 쓸데없는 창의력과 무모한 추진력의 산물이라는 점. 그래 놓고 세금을 더 내라고 시시때때 요구하는 게 정치권과 공무원이라는 점까지도.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