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서양인 최초 티베트 비구니’ 텐진 빠모 스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25일 03시 00분


“여자가 성불하기 어렵다는 말은 남자들의 선동일 뿐”

자주색 가사를 입고 자비로운 미소를 띤 텐진 빠모 스님은 “여성들이 남자를 적으로 만들려거나 흉내 내려 하지말고 자신들 안에 있는 특별한 힘을 자각해 스스로 깨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자주색 가사를 입고 자비로운 미소를 띤 텐진 빠모 스님은 “여성들이 남자를 적으로 만들려거나 흉내 내려 하지말고 자신들 안에 있는 특별한 힘을 자각해 스스로 깨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오늘날 대부분 영적 지도자들은 남성이다. 그들 중에는 여성의 영성(靈性)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여성 사제를 인정하지 않는 여타 종교에 비해 불교는 ‘비구니’라는 독립된 여성 사제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종단 내 차별은 엄연하다.

서양인 최초로 티베트 불교에 귀의한 비구니이자 ‘나는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리라’(김영사)란 책으로도 국내에 잘 알려진 텐진 빠모 스님(71)이 내한했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보고 싶었던 것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요즘, 종교계 여성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토요일이었던 지난 16일 늦가을 정취가 가득했던 조계사에서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자주색 가사를 입은 그와 합장 인사를 마치고 앉자마자 질문을 시작했다. 통역은 서울대 철학과 조은수 교수가 도와주었다.

세상이 원하는 건 조화

―불교 종단 내 여성의 지위는 어떤가.

“성차별이 엄존한다. 그나마 한국 대만은 형편이 낫지만 태국 미얀마는 남자들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계(戒)를 받는다. 사찰에서 가정부처럼 사는 여승들도 있다. 옷도 남자들과 똑같은 색을 못 입는다. 수련과 교육 기회가 차단되니 비구니들은 비구(남자 승려)보다 갈수록 낮은 지위에 처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하지만 변화가 일고 있다. 계를 비구와 똑같이 주자거나 비구니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자는 운동들이 확산되고 있다. (차별이라는) ‘댐’은 결국 무너질 것이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분별없는 경지이다. 속가(俗家)보다 더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라마다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스리랑카의 경우 11세기에 회교도 침공을 받으면서 비구니들이 사라졌는데 나중에 비구 교단만 부활하면서 영원히 잊혀진 존재가 됐다. 여성들조차 차별을 당연시했다. 무조건 남성들을 떠받들어야 하고 교육받을 필요조차 없다고도 생각했다. 또 여자들 스스로 여자로 태어난 것을 잘못된 업보를 받은 것으로 생각해 이번 생에 착하게 살고 열심히 기도해 다음 생에 남자 몸으로 태어나야지 하는 게 오랜 세월 생각해온 방식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게 여성들이 수행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종단 내 권력이나 남의 대접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깨달음(enlightenment)’을 얻는 데에만 매진하다 보니 비록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위대한 수행자들이 많이 배출됐다.”

질문을 ‘세속의 것’으로 돌렸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지다 보니 남자를 이기려고만 하면서 공격적으로 변해가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남성적인 ‘힘’을 더할 뿐이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은 ‘균형(balance)’이다. 이를 위해 여성적 힘이 필요한 것이지, 남성의 힘을 가진 척하는 여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힘을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남자보다 강한 근육이 없어서 ‘약하다’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더 강한 존재다. 문제는 여성들 스스로 이 특별한 힘을 발견해야 한다는 거다.”

―그게 뭔가.

“우리 절에서 일하는 인도 여성들은 그야말로 ‘멀티 플레이어’다. 하루 종일 짐을 져 나르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서는 요리와 청소를 하고 아이를 돌본다. 남자는 앉아서 담배나 피우면서 TV를 보는데 말이다(웃음). 한국도 확신하건대 여자들이 바깥일도 하고 집안일도 하는 투잡(Two job)일 거다. 하지만 여자들은 이 모두를 해낸다. 이게 바로 특별한 힘이다. 남성의 힘은 공격적이고 경쟁적이다. 승자(勝者)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도 있다. 하지만 여성은 남을 보살피고, 화합을 이뤄 사랑하고 어려움에 직면하더라도 인내하면서 이겨나간다. 여성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이 특별한 힘을 들여다봐야지 남성의 힘을 모방하려 해선 안 된다. ‘두 번째로 좋은 남성(second best man)’이 되려 하는 한 그 노력은 실패할 것이다.”

스님은 이 대목에서 갑자기 남자 목소리를 흉내 내며 “테너나 베이스, 바리톤이 아니라 소프라노나 알토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도 기자도 크게 웃었다.

여성만의 특별한 힘 자각해야

―방금 ‘투잡’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여성의 삶이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도 같다. 옛날에는 약자라는 이유로 보호받은 면도 있었는데….

“맞다. 여성들의 역사는 일부 진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후퇴한 면도 있다. 현대 여성들은 옛날 여성들보다 더 많은 짐을 지면서 스트레스도 더 많이 받고 있다. 옛날 여성들은 비록 넓은 시야를 가질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집’에서만큼은 자신의 왕국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집과 직장 두 곳에서 왕국을 가져야 한다(웃음). 나 역시 해결책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거듭 말했듯 여성들 스스로 자신들이 가진 힘을 깨닫고 목소리를 내면서 서로 도와야 한다. 여자들은 질투가 심하다. 직장에서도 여자가 승진하면 뒤에서 욕하는 사람들이 주로 여자들인 경우가 있다. 서로를 격려하지도, 존중하지도, 손을 잡지도 않는다. 이렇게 자기들끼리 싸우는 동안 남자들이 많은 것을 훔쳐 달아났다.”

그는 여성들의 ‘외모 집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아직도 많은 여성이 자신의 가치를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집중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여성 운동가들이 많은 일을 했지만 ‘정신의 변화(mind shift)’를 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미디어에 의해 여성에게 부여된 사고방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한국은 최초로 여성 대통령을 배출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 사회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결혼도 안 해 봤고 아이도 낳아 보지 않았으니 여자가 아니라고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스님도 독신이고 아이도 없는데 똑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대통령이 결혼 안 하고 아이가 없는 건) 시간이 없어서이지 않았을까(웃음). 여성은 아이가 있다 없다를 떠나 그 자체로 모성을 갖고 있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다.”

변치 않는 외모 집착

―요즘엔 애 안 낳고 결혼도 안 하는 여자들이 늘고 있다.

“와이 낫(Why not·왜 문제가 되지)?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누구든 원하는 것을 할 권리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는 남자가 지배하는 양(陽)의 시대였다면 앞으로는 여성이 지배하는 음(陰)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주장도 한다.

“중요한 건 균형이다. 음이 지배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불균형이다. 우리는 지금 가부장사회를 모계사회로 바꾸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둘의 조화를 이루어야 할 때다. 그것이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이다.”

질문을 다시 ‘깨달음의 문제’로 돌렸다.

―여자들은 신체적인 이유, 이를테면 한 달에 한 번씩 치러야 하는… 그런 일 때문에 감정의 진폭이 심해 깨달음에 이르기 어렵다는 주장을 들은 적이 있다.

“신체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남자들도 많다. 성적인 충동이 너무 강하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여자가 성불(成佛)하기 힘들다는 주장은 남자들의 프로파간다(propaganda·선전선동)이다. 여자가 남자보다 감정 변화가 심하다고 하지만 오히려 잘 제어하면서 사용하기만 하면 훨씬 더 빠르고 높은 성취를 할 수 있다.”

그는 바다를 예로 들었다.

“감정의 파고는 바다의 파도에 비유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노련한 수상스키 선수라면 파도에 파묻히는 대신 진폭이 큰 파도를 원할 것이다. 남들보다 훨씬 더 위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깨달은 사람들 중 남자가 많은가, 여자가 많은가.

기자의 우문(愚問)에 그는 “위 윌 네버 노(we will never know·그걸 알 수는 없다)”라고 했다.

“여성들은 많이 교육받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지도 않았으며 남자들처럼 큰 사찰을 세우지도 않는다. 목소리가 없으니 사람들이 그들(깨달은 여성들)에 대해 말하지도 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깨달은 여성이 없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티베트에서는 여승 7000명이 모여 수행하는 절이 있다. 그들은 정말 신심 깊은 수행자들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잘 모른다. 나는 여자들이 한번 뜻을 품으면 중심을 잃지 않고 헌신하고 몰입한다는 점에서 더 영적(靈的)이라고 생각한다. 오로지 수행에만 관심이 있고 다른 건 관심이 없으니까 말이다.”

깨닫기 전과 후

―12년간 동굴에서 혼자 수행했다고 들었다. 무섭지 않았나.

“여자가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남자들 때문이다. 위협이 없는 상황에서라면 혼자 있는 것을 꿈꾸는 여자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만약 혼자 있는 것이 두렵다면 스스로를 방어할 준비를 하면 된다. 예를 들어 독거 수행하는 비구니 중에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쿵후’를 배우는 사람들도 있다.”

―스님은 깨닫기 전과 후, 뭐가 달라졌나.

“불이 켜지기 전과 후의 차이라고 할까. 사물들이 분명히 보이게 된다.”

―뭐가 분명해졌다는 것인가.

“원래 모습 그대로 본다는 말이다. 심리학, 신경학에서도 다들 동의하는 건데,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투영(projection)이다. 다시 말해 무지 탐욕 분노 같은 색깔이 입혀져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우리 삶을 괴롭히는 고통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오염에 의해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깨끗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모든 이에게 차별 없이 마음을 열게 된다.”

―세상을 바라보면 때로 많이 슬프다. 스님도 슬픈가.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슬픔은 슬픔’일 뿐이다.”

:: 텐진 빠모 ::

속명은 다이앤 페리. 1943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18세에 책을 통해 불교에 관심을 갖고 스무 살에 인도로 가 영적 스승 캄툴 린포체를 만나 서양 여성으로는 최초로 수백 년간 금녀의 영역이었던 티베트 수도원에 들어갔다. 수행자 80명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는 그는 사원 내에서의 극심한 차별을 경험하면서 “반드시 여성의 몸으로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서원을 세우고 인도 최북단 ‘타율곰파’(선택된 장소라는 뜻의 티베트어)로 떠나 동굴생활 12년을 포함해 총 18년간 은거 수행을 했다. 요즘에는 전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성 출가자 교육 등 영적 깨달음을 추구하는 여성들을 돕고 있다.

허문명 오피니언팀장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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