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대한민국이 잃어버린 시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26일 22시 24분


선거 不服유혹에 사로잡힌 사람들
‘댓글 공세’ 정권 흔들기로 1년 소진
한 해를 이렇게 보내야 하나

종교계 妄想家들은 더 허황된 주장
신도가 神父를 걱정하는 딱한 세상

그러나 국정 책임은 대통령에 있어
지킬 것과 희생할 것 ‘두 레일’ 필요

배인준 주필
배인준 주필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는 48.7%의 득표율로 정동영 후보(26.2%)에게 531만 표차의 압승을 거두었다. 좌파진영은 유례없는 참패에도 불구하고 광우병 혹세무민으로 촛불을 켰고, MB 아웃을 외치며 정권과 나라를 흔들었다. 이명박 대한민국 17대 대통령은 국민이 자신에게 부여한 정통성을 확고히 살리지 못하고, 서울 광화문 촛불시위대를 향해 “여러분의 함성과 함께 제가 오래전부터 즐겨 부르던 ‘아침이슬’ 노랫소리도 들었습니다”라며 눈시울을 닦았다. 그리고 이념적 부초(浮草)정권이 되고 말았다. 대통령의 약세(弱勢)를 간파한 좌파진영은 국정에 협조하기는커녕 더 모질게 정권을 괴롭혔다.

이명박 정권의 탈(脫)이념 행보는 좌파정권 10년에 피멍이 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워주기를 바랐던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다. 단호한 사생관(死生觀) 없이 스스로 약체(弱體)가 된 정권은 ‘꼭 지켜내고 회복해야 할 가치의 보수(保守)’에 실패하면서 지지기반을 많이 잃었다. 국정 추진력도 함께 떨어졌다. 그 틈을 뚫고 노무현 후예세력이 부활했다.

6년 전 대선 직후 폐족(廢族)이라며 고개를 떨구었던 친노(親盧)세력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그리고 2012년 친노의 맏형 문재인 비서실장이 18대 대선후보가 되어 박근혜 후보와 겨뤘다. 박 후보가 51.6% 대 48.0%로 3.6%포인트, 107만여 표 이긴 선거 결과는 양자 대결구도의 속성을 감안할 때 비교적 큰 표차였다. 하지만 좌파진영은 박근혜 대한민국 18대 대통령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이번에는 광우병 대신 국정원 댓글이 휘발유가 되었다.

국정원 댓글이 민의(民意)를 바꿔치기했다고 믿는다면 그야말로 대한민국 유권자들의 정치적 판단력을 얕잡아보는 국민 모독이다. 트윗이나 리트윗은 50만 명 이상의 팔로어를 가진 조국이나 공지영 같은 사람을 거칠 때 위력을 발휘한다. 새로 드러난 트윗 또는 리트윗 글 120만 건은 수가 대단해 보이지만 트윗 또는 리트윗하는 사람이 많은 팔로어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 영향력은 미미한 것이다. 누가 무명의 국정원 직원을 팔로했겠으며, 또 자신을 팔로하는 국정원 직원이 보낸 진부한 글들을 눈여겨봤겠는가. 그것은 무차별 살포된 사이버 삐라가 아니라 확장성이 떨어지는 네트워크에서 돌고 돈 쪽지와 같은 것이었다. 국정원 댓글이나 트윗이 대선에 영향을 주기에는 박근혜 문재인 두 후보진영이 직접 쏘아올린 상호공격의 포화(砲火)가 선거기간 내내 국민 속을 뒤덮고 있었다.

국정원 댓글이 인터넷 바다에 떨어진 물방울 정도라고 해서 간과해도 된다는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국정원의 직무 일탈에 대해서는 국정원법 위반이건, 선거법 위반이건 확실한 증거와 법리를 바탕으로 사법적 처리를 해야 한다. 다수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투명한 수사와 조사로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 사안이 대한민국을 1년이나 뒤흔들 사안인지에 대한 판단도 해봐야 한다. 국정원 댓글 문제가 산적한 민생현안보다 정말 더 큰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국민의 선택을 받겠다는 정치인들이라면 종교계의 일부 망상가(妄想家)들과는 달리 현실적 균형감각을 가져야 마땅하다. 국민을 걱정해야 할 국회가 국민의 골칫거리가 되고, 신도들을 걱정해야 할 신부가 신도들의 사고뭉치가 되는 시대는 끝낼 때가 되었다.

물론 박 대통령이 보다 소통적인 자세로 나와야 한다. 대통령이 “여야가 합의하면 따르겠다”고 말하는 데 그쳐서는 곤란하다. 여야가 합의를 하면 대통령이 따르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이다. 여야가 합의할 수 있도록 대통령이 전화를 돌리건, 식탁에 초대하건 직접 얼음을 녹여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를 양보하면 둘을 내놓으라며, 야권이 국정을 끝없이 방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더 큰 정치, 더 바른 정치를 하는지 국민이 지켜본다. 누구 탓이건 2013년 한 해가 ‘잃어버린 1년’으로 귀결된다면 그 불행은 정권과 국민 몫이 된다. 대통령과 여권 지도부는 어떤 평가를 원하는가. 민생을 위한 성취 없이는 정권의 성공도 없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외줄만 타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지킬 것과, 양보하고 희생할 것의 두 레일을 깔아야 한다. 그리고 국민에게 희망의 불씨를 살려줘야 한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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