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김화성]난 장기짝인가 바둑알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27일 03시 00분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이 세상엔 ‘다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바둑, 한국 정치인, 남자의 그것’이 그렇다. 바둑은 멀쩡했던 돌들이 한순간에 죽기도 하고, 다 죽었던 대마가 화르르 살아나기도 한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바둑알은 그저 ‘검은 돌-흰 돌’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한번 바둑판에 놓여지기만 하면 오만가지 조화를 일으킨다. 흑백 두 색깔로 수천수만의 ‘전투 상황’을 만들어 낸다. 바둑알이 ‘노란 돌, 빨간 돌’로 바뀐다 해도 마찬가지다.

장기는 장기짝 하나하나마다 역할(role)이 있다. 장기짝은 그 역할에 따라 움직인다. 축구, 야구, 농구 등 단체경기 선수의 포지션과 비슷하다. 직장인의 직책도 그렇다.

장기와 바둑은 패러다임이 완전히 다르다. 장기는 ‘적의 임금 쓰러뜨리기’이다. 부하들이 모두 살아 있어도 ‘임금(宮)’이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다. 패배다. 거꾸로 부하들이 다 죽어도 최후까지 임금이 살아 있으면 승리한다. 임금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게 최우선이다. 졸(卒), 마(馬), 상(象), 포(包), 차(車) 할 것 없이 온몸을 던져 임금을 향해 쏟아지는 창과 화살을 막아 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적의 임금을 향해 공격해야 한다.

바둑은 한마디로 ‘땅 뺏기’다. 바둑알은 어느 바둑알이든 하는 일이 똑같다. 직책도 평등하다. 바둑알은 우선 자신부터 살아야 한다. 그러나 혼자 산다는 건 불가능하다. 다른 바둑알과 ‘연대해야(끊어지지 않아야)’ 살 수 있다. 서로 손에 손을 맞잡고 ‘생존 띠’를 만들어야 한다. 바둑판엔 전후방이 따로 없다. 바둑알이 놓여지는 곳, 바로 그곳이 싸움터다. 그 땅이 어느 곳이든 싸워 이겨 ‘두 집’만 내면 곧 자신의 영토가 된다.

축구와 농구, 핸드볼은 모든 공격과 수비가 골대에 집중된다. 골대 앞에 공과 선수가 몰린다. 임금을 중심으로 싸움이 벌어지는 장기판과 비슷하다. 배구, 배드민턴, 테니스는 모든 곳이 싸움터다. 바둑의 ‘네 귀’ ‘네 변’에서 두 집내기가 쉽듯이 배구, 배드민턴, 테니스에서 공격 성공률이 가장 높은 곳도 상대 코트의 모서리와 양변이다.

장기는 수직적 조직이다. 바둑은 수평 조직(연대)이다. ‘장기가 공간을 ‘코드화’하고 ‘탈코드화’하는 데 반해, 바둑은 공간을 ‘영토화’하고 ‘탈영토화’한다.’(질 들뢰즈)

독일 축구는 촘촘한 조직력으로 유명하다. 선수들은 각각 코드화되어 있다. 장기판의 장기짝처럼 일정한 임무가 부여돼 있다. 하지만 ‘물샐 틈’이 생길 때도 있다. 한순간 볼을 빼앗겨 역습을 당할 때 조직력이 와르르 무너진다. 말(馬)이 있어야 할 자리에 상(象)이 있게 되면 허둥지둥한다. 그 상(象)은 잽싸게 변신해 말(馬)의 역할을 해 줘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네덜란드식 토털축구는 바둑의 수평조직을 차용한 축구다. 모든 선수가 자신의 역할이 있지만 그 역할은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한다. 장기에서 포(包)는 포(包)의 역할밖에 못하지만 바둑에서 바둑알은 그 어떤 역할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장기판에서 장기짝들에게 그 역할을 지정해 주지 않고 무조건 임금을 지키라고 하면 우왕좌왕 어쩔 줄 모른다. 그렇다고 각 조직원의 역할만 강조하다 보면 그 역할과 역할 사이에 틈이 생긴다. 그 틈은 조직을 금가게 한다. 최고의 조직은 구성원 스스로 알아서 자신의 능력을 100% 발휘해 주는 조직이다. 하지만 조직 속의 인간은 역할을 주지 않으면 잘 움직이지 않는다.

프랑스철학자 들뢰즈는 말한다. “바둑알은 작은 낱알에 지나지 않는다. 익명 또는 집합적이거나 3인칭의 기능밖에 하지 못한다. ‘그것’은 오로지 이리저리 움직일 뿐이다. 바둑알은 목적도 목적지도 없고 출발점도 도착점도 없는, 끝없는 ‘되기(생성)’다. 바둑은 전선 없는 전쟁, 충돌도 후방도 없으며 심지어 어떤 경우엔 전투마저 없는 전쟁이다.”

그렇다. 인생은 ‘끝없는 되기(생성)’다. 이른바 ‘창조인생’이다. 시작도 끝도 없다. 전선도 없고 전투도 없다. 그런데도 살다 보면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당연히 바둑알처럼 사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강호 세상은 여전히 장기판이다. ‘장기짝 인생’을 요구한다. ‘까라면 까’야 한다. 숨이 턱턱 막힌다. 오호, 난 장기짝인가 바둑알인가.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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