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 당시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을 지낸 예비역 육군중장 채명신 장군이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삶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참군인의 길이었다. 살아있는 권력에도 거리낌 없이 직언을 했던 소신 있는 군인이었다. 사선(死線)을 넘으면서도 자유 의지를 꺾지 않았던 채 장군의 영전에 삼가 조의를 표한다.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나 교사로 일하던 고인은 1946년 북한군 사관학교 격인 ‘평양학원’ 개교식에서 김일성을 만난다. 하지만 이상과는 다른 공산주의 사회의 현실을 목도한 고인은 같이 일해보자는 김일성의 권유를 뿌리치고 1947년 월남해 6·25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군인 채명신 인생 최고의 순간은 1965년 8월부터 3년 8개월간의 주월 한국군사령관 시절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베트남전쟁을 ‘명분 없는 전쟁’이라며 반대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명령하자 국가의 소명(召命)으로 받아들였다. 둑코 전투와 짜빈동 전투는 1개 중대 병력으로 6배나 많은 월맹군을 괴멸시킨 전사(戰史)에 남을 대첩이다. 미군들은 그를 군신(軍神)으로 존경했다. 애초에 한국군의 독자적인 작전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던 미군도 채 사령관의 능력을 믿고 작전권을 넘겨줬다.
박 전 대통령의 5·16군사정변에 가담해 혁명5인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에도 참여했지만 군인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신개헌에 나선 박 전 대통령에게 “장기 집권은 각하를 죽이는 길이다. 스스로 정권을 연장하겠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고언을 여러 차례 했다. 괘씸죄에 몰린 고인은 결국 꿈에 그리던 4성 장군 진급이 좌절된 뒤 1972년부터는 외교관으로 국가에 봉사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는 “나에겐 철모가 필요치 않다”며 평생 천으로 만든 군모를 고집했다. 생전에 받은 태극무공훈장(1회), 충무무공훈장(3회), 화랑무공훈장(1회), 을지무공훈장(2회)은 채 장군의 용맹한 삶을 증명해 준다. 평생을 공산정권과 싸워온 고인은 생의 마지막까지도 투철한 안보관과 국가의식을 강조하며 종북세력의 준동을 경계했다. 용장(勇將) 채명신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애국심과 군인정신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