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88>은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29일 03시 00분


은혼
―김명인(1946∼)

바닥의 무료까지
지치도록 퍼낼 생(生) 거기 있다는 듯
모든 풍경들 제 색깔을 마저 써버리면
누런 햇빛 알갱이들 강을 싸안고 흩어지는 것 같아
물소리 죄다 흘러 보내더라도
더는 못 가게 마음 방죽 쌓아 너를 가둔다
잎들을 얽으려 할 때 햇살들이 마구 엉겨 붙어서
초록 기억으로 흠뻑 젖었던 적은 없느냐?
그때에도 사나운 이목, 다리 아래 격랑보다 더 두려웠다
나는 무슨 워낭으로도 네 베틀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어서
갈바람 낙엽 행낭에 담아 세월이라 부친다
받아 보거든 은하 물살 거세었음을 알리라
머리 위로 깃털 빠진 까막까치들 날아간다
길 아닌 길도 땅 위의 것이라고
이제 내가 겨우 깨쳐서 놓고 있는 징검다리,
저문 혼례 그 언저리나 맴도는
이 가을날 꿈같이, 빛같이


‘견우와 직녀’는 견우성과 직녀성, 두 별에 얽힌 이야기다. 근면한 목동 견우와 베 짜는 처녀 직녀가 결혼을 했는데, 알뜰살뜰 살림을 일구지 않고 사랑에 빠져 일을 작파하자 하늘의 왕이 그 둘을 은하의 동서 양끝으로 갈라놓았다고 한다.

둘의 슬픔을 보다 못한 까치와 까마귀가 1년에 한 번 하늘로 날아올라 가 은하수에 다리를 놓아줘서 만나게 해준다는 날이 칠월 칠석이다. 그 하루를 제외한 1년 내내 상대를 그리며 살아가는 은하의 사랑! 직장에 매여 서로 다른 나라에 살면서 휴가철에나 만나는 글로벌 연인들이 떠오른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꼭 맞지는 않나 보다.

화자는 견우고 그의 반려자는 직녀다. 날마다 만나도 1년에 한 번 만나는 직녀처럼 당신이 그립고 애틋하단다. 이 사랑의 스케일! 은혼(銀婚)이 돼도 식을 줄 모르는 부부애다.

젊었을 때는 꽃이련만 이제 낙엽을 바치옵니다, 내 저문 혼례의 반려자여. 이 시는 은혼이 된 부부들의 애송시가 될 만하다. 결혼한 지 25년 된 것이 은혼이다. 25년이 지나도 날마다 애틋하다니, 사랑은 호르몬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일설을 뒤엎는다. 갈바람 치는 세월을 함께 헤쳐 온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이 시를 읽으며 눈시울 뜨거워질 부부도 있으리. 이혼율 높은 이 시대에 이렇게 긍정적인 감정의 시라니!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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