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중학생들이 태어난 해는 1998년부터 2000년 사이. 동아일보는 청소년 성평등인식조사를 위해 초등학생에 이어 중학생들을 택했다. 아직 입시에 대한 부담이 적어 고등학생보다는 사고와 행동이 자유로우면서 초등학생보다는 사고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본보는 서울시내 중학교 11곳에 재학 중인 중학생 98명(여학생 76명, 남학생 22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더불어 학생들의 변화를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본 경력이 많은 베테랑 교사들도 인터뷰했다. 결과는 3일자 초등학생 편과 마찬가지로 여풍(女風)이 생각보다 거셌다.
○ 여자애들이 무서워
우선 학내 생활의 주도권을 대부분 여학생이 쥐고 있었다. 중3 여학생은 “우리 반에는 여자 반장, 남자 반장이 한 명씩 있는데 남자는 주로 공부 1등이 뽑히지만 여자는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은 애가 뽑힌다. 그렇다 보니 실질적으로 학급에서 리더십을 갖는 것은 여학생”이라고 말한다.
학급 내 주요한 의사결정도 여학생들이 주도하는 편이다. 한 남자 중학생의 말이다.
“운동회를 앞두고 반 학생들이 입을 유니폼을 정하는데 분홍치마와 저고리로 결정됐어요. 이어달리기를 맡은 남자애들이 ‘어떻게 치마를 입고 달리느냐’고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중요한 의사결정은 거의 여자애들이 정하고 남자애들은 그저 따라가는 편이에요. 같은 학년, 같은 나이인데도 여자애들이 누나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교직생활 15년차라는 한 중학교 교사는 이렇게 말한다.
“요즘 교사들 사이에서는 ‘여자아이가 왜 그렇게 장난이 심하냐’ ‘여자애가 그렇게 거친 말을 쓰면 되겠니’ 하는 말들은 금기어다. 여학생들이 바로 ‘아니, 남자는 그런 말을 써도 된다는 뜻인가요?’ 하고 그 자리에서 따지기 때문이다. 요즘엔 여학생들을 혼낼 때 ‘학생이 그러면 되겠니’ ‘네 행동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니’라는 말로 대신해서 쓴다.”
이와 관련해 한 중3 여학생은 “여자는 이래야 하고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건 어른들이 만든 것”이라며 “‘여자니까 얌전해라, 여자니까 조용히 웃어라’ 하는 말을 들으면 더 반대로 행동하고 싶어진다”고 했다.
요즘 여학생들은 말도 행동도 거칠다는 게 중론이다.
교직생활 30년차인 한 중학교 교사는 학기 초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학부모들에게 ‘담임교사에게 바라는 점이 있느냐’라는 통지문을 보냈더니 아들을 자녀로 둔 학부모 3, 4명으로부터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을 때리는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다”고 답이 온 것이다. 중학생 아들을 둔 40대 주부도 “요즘 여자애들이 거친 욕설도 마구 해대고 심하게 남자애들을 때리기도 하는데 교사들이 여자애들이라고 이런 행동을 가볍게 넘기고 있다”며 “남자애들 폭력만 문제 삼고 여학생들 폭력은 온정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했다.
중학교 1학년 한 남학생의 말이다.
“여자애들 한 대 때리면 남자애들은 스무 대를 맞아야 해요. 여자애들은 말도 엄청 잘하기 때문에 싸우면 이길 수가 없어요. 게다가 말의 절반은 욕이에요. 어떤 애들은 일부러 남자애들 발을 걸어서 넘어뜨리거나 체육복 바지를 밑으로 죽 잡아당기는 장난도 합니다. 야동(야한 동영상) 보자는 여자애들도 있고 수련회 때 남자애들 숙소에 쳐들어오는 애들도 있어요. 남자 화장실도 아무렇지 않게 들어오는 애들까지 있을 정도이니 말 다 했죠.”
또 다른 남학생(중1)은 “여자애들이 남자애들보다 더 무리지어 다녀서 무섭다”며 “남자들은 혼자 있는 애들도 많고 그런 걸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여자애들은 학교나 밖이나 무조건 몰려다닌다. 남자끼리는 싸워도 30분만 지나면 같이 노는데 여자애들하고 싸우면 그날로 끝”이라고 했다.
○ 고백도 내가 먼저
학업 능력면에서도 여학생들이 남학생을 앞선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교직생활 19년차인 한 교사는 “얼마 전만 해도 수학 과학 과목은 남학생들이 압도적으로 잘했는데 요즘은 아니다. 여자아이들이 공부뿐 아니라 학교생활 전체를 주도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특히 정해진 시간 내에 결과를 도출해 내야 하는 수행평가 때는 여자아이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또 다른 교사는 “수행평가 조를 짤 때 일부러 여학생들을 적절하게 배치시킨다. 남학생들끼리만 모아놓을 경우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하다가 마감시간 내 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본보 인터뷰에 응한 남녀 학생들 모두 “여학생이 좀 더 조숙하다”는 것에 동의했다.
“남자아이들은 뭔가 어수룩하거나 담임선생님 전달사항을 도중에 빼먹고 전달하지 못한다”(중2·여) “남자 반장은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같이 떠들 때가 많다”(중2·남)
실제로 학습시간 자체가 여학생들이 더 많다. 통계청이 1월 인터넷에 공개한 ‘같은 듯 다른 듯 남과 여’ 프로그램을 보면, 우리나라 10대들의 학습시간은 남자 7시간 5분, 여자는 7시간 21분으로 여자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컴퓨터 게임은 남자 55분, 여자 20분으로 남자가 월등하게 많았다.
여학생들의 적극성은 애정 공세에서도 마찬가지다. 인터뷰에 응한 여중생들의 말이다.
“반마다 커플들이 많아요. 그런데 좋아하는 애가 있으면 당당하게 말하고 고백하는 애들 중에는 여학생들이 많아요. 얼굴 보지 않고 카카오스토리로 고백하는 여자애들도 있어요. ‘누구누구를 학원에서 처음 봤는데 첫눈에 반했다’는 글을 올리면 친구는 물론이고 친구의 친구들까지 다 보죠. 한 친구는 아예 날을 잡아 장미꽃다발을 하트 모양으로 만들어 남자애한테 이벤트하듯 고백했는걸요. 손잡기 같은 스킨십도 여자애들이 먼저 하는 경우가 많아요.”(중1)
“지금 사귀는 남자친구랑 어디서 만날지 뭘 먹을지 뭐 할지 이런 것은 거의 제가 결정하는 편이에요. 손도 제가 먼저 잡았어요. 데이트 비용도 반반씩 내고요.”(중3)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말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거리는 남자애들 고민 상담하는 것도 여자애들이에요. 요새는 남자애들이 더 잘 삐쳐요. 그래서 상처받지 않게 조심조심 말해야 해요.”(중3)
한국 사회 중학생 부모들 대부분은 맞벌이다. 교사들은 여중생들의 성평등 인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들을 ‘밖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엄마’를 꼽는다.
서울 시내 한 중학교 교사는 “학교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어서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딸들을 변화시킨 건 바로 가정”이라고 설명한다. 교직 29년차라는 한 교사도 “딸 가진 부모들은 ‘밖에 나가서 남자애들한테 지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10대 시절엔 여자애들이 더 차분하고 성실한 면이 있는데 요즘 10대에게는 여기에 ‘성 차별’이라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부모가 맞벌이를 한다는 한 여중생은 “엄마 아빠 모두 일을 하기 때문에 집안일은 여자만의 몫이 아니다”라면서 “심지어 우리 아빠는 종종 엄마한테 ‘당신이 나보다 월급이 많으니 내가 그만두고 살림을 하고 싶다’고 진지하게 말씀을 하신다”고 했다. 또 다른 학생은 “아빠가 퇴근해서 청소하고 빨래를 한다. 피곤한 모습이 역력한데 집안일까지 해서 어떨 때는 그런 아빠가 불쌍해 보인다”며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함께 직업이 있는데 한 사람만 가사를 전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인터뷰에 응했던 한 중2 남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여중생들이 20대가 되면 ‘성 차별’ ‘성 평등’이란 말 자체가 사라질 것 같아요. 그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이미 불평등을 인정하는 말이잖아요. 요즘 남학생들도 여자애들을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아요. 엄마를 대신해 요리나 빨래 같은 집안일도 잘하는 애들이 많아요.”
정말 이 남학생 말대로 이들이 사회로 나오는 20대가 되면 성차별이란 말 자체가 사라져 있을까. 장담할 수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요즘 10대는 무섭게 변해 있고 곧 이들이 주도할 세상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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