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원을 뜻하는 은어인 ‘스푹스’는 영국 공영방송 BBC에서 2002년부터 2011년까지 10시즌에 걸쳐 방영한 드라마 제목이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어 미국 프랑스에선 ‘MI5’라는 제목으로 전파를 탔다. MI5와 MI6는 영국의 대표적인 정보기관이다. 007로 잘 알려진 MI6는 해외 정보기관이고 MI5는 국내 정보기관이다. 이 중 MI5의 활약상을 그린 스푹스는 ‘리얼리티’가 좋다. 시나리오가 실제에 상당히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드라마 속 요원들은 권력층의 비리를 파헤치고 국내에 잠입한 무슬림 테러분자들의 테러음모를 분쇄하며 각종 암살음모를 적발해 저지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요원이 목숨을 잃는다.
스푹스를 보면 영국의 어두운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부의 부정부패와 미국과의 갈등, 알카에다 등의 테러위협, 인종 문제 등 어떻게 이런 드라마가 공영방송 전파를 탔는지 의아할 정도다. 게다가 드라마 속 요원들의 활동은 대부분 불법이다. 무제한으로 도청을 하고 불법 혐의로 수감된 요원을 빼돌려 해외로 도피시킨다. 필요하면 암살도 한다. MI5를 관할했던 전직 내무부 장관에게서 스파이 혐의가 나오자 MI5 간부가 그를 직접 살해하는 내용도 있다.
이상한 건 드라마를 다 보고 나면 영국에 대한 걱정보다는 조국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는 MI5와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는 요원들의 모습에 잔잔한 감동이 인다는 점이다. 최근 만난 국내의 한 전직 군 정보기관 장성은 “MI5, MI6에 대한 영국인들의 신뢰는 대단하다”고 전했다.
스푹스를 보며 국가정보원이 떠올랐다. 1년여간 박근혜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는 ‘댓글’ 사건의 당사자인 국정원은 제대로 항변도 못하고 매질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국정원을 파렴치한 범죄집단인 양 일방적으로 비난해도 되는 것일까.
지난 시절 국정원은 국내 정치에 탈법적으로 개입해 민주 인사들을 탄압했고 심지어는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살해한 얼룩진 역사를 갖고 있다. ‘댓글 공작’도 잘못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남북이 대치 중이고 주변 강대국에 포위되어 있는 한국의 안보 현실에서 국정원이 맡은 역할은 막중하다. 국정원 활동의 극히 일부인 ‘댓글’로 조직 전체를 매도해선 안 된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이나 이스라엘의 모사드, 러시아의 연방보안국(FSB), 일본의 내각 정보조사실, 중국의 정보조직, 북한의 정찰총국이나 국가안전보위부 등 세계의 정보기관들은 각자 국익을 위해 소리 없이 치열한 첩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장성택 실각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4일, 국내 군 정보전문가로 최근 퇴역한 예비역 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말이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 군 정보기관의 주요 해외활동 거점과 인적 네트워크는 다 무너졌다. 미국의 정보지원이 없어지면 우리 군의 북한에 대한 정보는 거의 깜깜한 수준이다. 북한 핵을 다룰 수 있는 능력도 미약하다. 우리에겐 첩보위성도 없지 않은가. 우리 정보기관이 북한 내부 동향과 안보위협을 과연 얼마나 상세히 알고 대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기자는 몇 달 전 미 국가안보국(NSA)에서 일했던 한인 교포를 만난 적이 있다. 스푹스를 보고 난 뒤 그가 그때 해준 충고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국가정보가 강해지려면 첫째 뛰어난 인재, 둘째 ‘국가를 지킨다’는 긍지, 셋째 돈 과학기술 등 물적 자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한국의 안보를 위해서는 정보기관이 더 강해져야 한다. 무엇보다 국민의 신뢰와 국가적 지원이 필요하다.”
댓글 4
추천 많은 댓글
2013-12-05 14:32:04
정보기관에 대해 결코 좋은 기억을 지니고 있지 않을 동아일보에서 과거에 매여 편협하고 왜곡된 인식이나 감정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역사와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문제제기 해주는 이런 시도가 있기에 역시 국민과 독자의 신뢰를 받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2013-12-05 12:29:51
국정원 개혁도 모자라 폐지를 주장하는 무리들도 있다.과연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 국내정보수집을 차단하면 간첩들의 활동을 획기적으로 도와 주는 꼴이다.앞으로는 정보가 그나라의 명운을 좌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정치권과 정부는 더욱더 정보역량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2013-12-05 17:37:52
국정원의 정치개입 금지나 일부 개혁하여야할 부분은 있겠지만 우리나라 상황에선 국정원의 기능을 더 강화해야한다. 그런데 국민의 90% 이상이 불신하는 국회에서 국정원을 개혁하겠다는 것은 국정원을 무력화 시킬수도있다.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먼저 개혁하여야할 집단은 국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