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잊은 눈비가 땀구멍마다 들어찬다 몸 안에 잠자던 운석이 눈을 뜬다 목탁 구멍 같은 뼈마디 사이로 이승이 밀려 나간다 구름들의 뒤 통로에 짓다 만 집 한 채 스스로 불탄다 마지막 입술이 한참동안 떨린다 나부끼는 재(災) 누군가 텅 빈 문을 열고 타다 남은 햇살을 주워 담는다 뜻 없이 불러본 이름들이 마음보다 길게 늘어서 지나온 이승에서 즐겁게 눈물겹다 보이는 것들은 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된다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어느덧 새 이름을 얻는다 계절이 빠르게 바뀐다 숨을 쉬니 한 세상이 저만치 다른 상처에 다 닿았다
실제 일몰(日沒) 풍경과 거기 제 생의 일몰을 겹쳐 보는 마음이 아프게 그려진 시다. 지구의 시간은 우주의 억겁 시간 속에서 티끌처럼 미미하다. 하물며 인간의 시간은 우주가 눈 한번 깜박이는 것. 종종 우리가 눈 깜짝할 새 세월이 가버린 것처럼 느끼는 건 제대로 느끼는 거다. 눈비 몇 번 내리고 계절 바뀌고 세월이 술술 새어 한 생이 끝나는데, 우리의 평소 생의 감각은 다행히도 느른하게, 그 짧은 시간을 알뜰히도 핥으며 지나오도록 만들어져 있다.
‘짓다 만 집이 스스로 불탄다’니, 화자 필생의 계획이나 사람과의 관계가 허사가 됐나 보다. 입술이 부르르 떨릴 수밖에. 이렇게 이룬 일 없이 허무하게 한 생이 끝나는가. 일몰의 시간은 우리 존재의 덧없도록 왜소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죽은 사람처럼 외로운 그 각성 속에서 화자는 어느새 이승과 저승을 왔다 갔다 한다. ‘뜻 없이 불러본 이름들이 마음보다 길게 늘어서’ 지나온 세월에서 인연이 닿은 사람들, 몇 안 될 줄 알았는데 꼽아 보니 많다. 내가 아주 외롭게 살지는 않았구나. 아, 그러나 ‘보이지 않게 된 보이던 것들’! 아픔 속에서 ‘숨을 쉬니 한 세상이 저만치/다른 상처에 다 닿아 있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도처에 상처! 시인 강정의 특징인 파토스(정념)가 모든 타인들에 대한 연민으로 그윽해지는 일몰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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