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이니 벌써 15년 전 일이다. 예정된 1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귀국을 앞둔 나는 가족과 함께 장장 한 달간의 장거리 자동차여행을 떠났다.
태평양변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부 해안으로 남행한 뒤 멕시코와 국경을 이룬 텍사스 등 남부 여러 주를 관통해 미국 최남단 키웨스트(플로리다 주)까지 갔다가 거길 반환점 삼아 나이아가라폭포(미국과 캐나다의 국경)를 향해 대서양변의 동부 여러 주를 차례로 통과하며 북상하는 루트였다. 무려 1만9000km의 대장정이었는데 이렇듯 미국을 종단 횡단하며 거친 주(州)가 열세 개나 됐다. 비록 주마간산의 자동차여행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내겐 그 땅을 두루 둘러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런 내게 많은 미국인 친구가 물었다. 도대체 이렇게 힘든 여행을 왜 하냐고. 그 질문에 내 대답은 늘 같았다. 도대체 미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큰지 체험해보고 싶어서라는. 그런데 여행을 마치고 나니 미국은 내가 가늠했던 것보다도 훨씬 컸다. 그리고 평소 내가 생각했던 것과 판이하게 다른 나라라는 것도 터득했다. 할리우드 무비에 표출된 폭력 일변도의 그런 모습도, 돈과 시간으로만 가치를 평가하는 그런 까칠한 사람들의 사회가 아님을 피부로 느꼈다. 그들 역시 우리와 모습만 다를 뿐 걱정거리며 웃을 일은 서로가 전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의 보통 나라였다.
그 여행 도중 뉴올리언스(루이지애나 주)에 들렀을 때다. 8월 초 어느 날로 뉴올리언스 구시가의 프렌치쿼터(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형성된 프랑스풍의 옛 거리)를 걷고 있는데 50대 중반의 한 한국인 남자분이 우리 가족을 보고는 다가와 대뜸 한국인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해 커피숍에 들어가 마주 앉았다. 당시 그는 스무 살 남짓한 청년과 함께 있었는데 알고 보니 아들이었다. 그는 아들을 내게 소개하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내용은 이랬다. 아들이 고등학생 때부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매일 드럼만 두들기며 대중음악을 하겠다고 어깃장을 부려 수도 없이 때리고 달랬건만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부자 사이가 좋을 리 없을 텐데 이 먼 미국 땅에서 두 사람이 함께 여행을 하고 있으니 그 배경과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분이나 아들 모두 영어가 서툰 듯했으니 의문은 더더욱 가중됐다.
그런데 그분이 한 이 말이 나를 놀라게 했다. 어느 날 자신이 마음을 바꿨다는 것인데 아들이 포기하지 않겠다니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기왕에 드러머가 될 바에야 한국 최고의 연주자가 되어야 할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들이 드럼 연주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게 해야겠다고 생각을 굳혔고 그래서 이렇게 아들의 손을 끌고 무작정 미국에 왔다는 것이다. 음악의 도시로 소문난 이곳 뉴올리언스를 찾아서.
그러면서 그분은 어떻게 해야 아들의 꿈을 여기서 키울 수 있겠느냐며 내게 그 길을 묻는 것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당시 뉴올리언스를 찾은 이유는 나도 그분과 다르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들어온 재즈-부친은 트럼펫 연주자로 재즈플레이어였다-가 여기서 태동했고 내 아버지가 우상으로 섬겼던 사치모(전설적인 흑인 트럼펫 연주자 루이 암스트롱의 애칭)와 그의 음악을 추모하기에 라틴 쿼터의 재즈클럽만 한 곳이 없다고 생각해 일부러 들른 것이었으니. 그렇다 보니 그분의 뜬금없는 요청이 느닷없기는 해도 단칼에 모른다고 외면할 수만도 없는 입장이 돼 그 자리에서 한참이나 함께 고민해 주었다. 그럼에도 딱히 마땅한 대답을 주기엔 역부족이어서 당시 내 조언은 예까지 왔으니 매일 저녁 재즈클럽에 들러 연주를 보고 들으며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나머지는 아들에게 맡기라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내겐 버릇이 하나 생겼다. TV나 공연장에서 밴드의 연주를 듣게 되면 늘 드러머에게 집중하고 살피는 것이다. 혹시 저이가 뉴올리언스에서 마주쳤던 그 청년은 아닐지. 그런 대담한 아버지에 그렇게 뜨거운 열정의 아들이라면 지금쯤 훌륭한 연주자가 되어 자신의 음악세계를 열정적으로 펼쳐나가고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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