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방부 미셸 플루노이 정책차관이 지난해 초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겠다”며 사임했을 때 뒷얘기가 무성했다. 정책차관은 국방부의 ‘넘버3’로 국방부에서 그렇게 높이 올라간 여성은 플루노이 차관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의 돌연한 사임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물러날 리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례적으로 국방부가 보도자료까지 내 진화에 나섰다. “플루노이 차관의 사임 결정은 전적으로, 그리고 다른 그 어떤 이유도 없이 가족에 대한 애정 때문에 나온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차관은 직장에서 높은 신임을 받았습니다.”
플루노이 차관이 업무 무능력자로 오해 받지 않도록 “진짜 가족 때문에 사임했다”며 친절하게 설명에 나선 것이다.
스타 롤모델의 이면
미국에서는 남녀 불문하고 고위직에 있는 간부가 “가족과 시간을 보내겠다”고 직장을 그만두면 주변으로부터 “실은 해고를 당한 것”이라는 얘기를 듣기 십상이다. 가정을 아무리 사랑해도 사회생활 무능력자로 오해 받고 싶지 않다면 직장을 그만두기가 쉽지 않다. 여성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어렵게 오른 성공이라는 자리를 가정 때문에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미국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국무부 앤마리 슬로터 전 정책국장도 비슷한 경우다. 그는 사춘기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2011년 국무부 최초 여성 정책국장 자리를 그만두고 프린스턴대 교수로 돌아갔다. 그러자 주변에서, 특히 젊은 여성들로부터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성공한 여성 롤모델이 가정 때문에 일을 포기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겠느냐”는 질타였다.
그 후 슬로터 교수는 한 잡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가정과 직장에서 동시에 유능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있는 여성이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 가정을 택하는 여성을 실패자로 보는 주변 시선 때문에 나 역시 한동안 우울증에 빠지기까지 했다”고 고백했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치인 스타 여성 롤모델들 많다.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말할 것도 없고 하원의장 출신인 낸시 펠로시 하원 민주당 대표, 미셸 바크먼 하원의원도 비슷하다. 이 중 펠로시 대표는 다섯 명의 자녀를 낳고 40대 중반에 정계에 데뷔해 의회 최고의 여성 지위에 올랐고 바크먼 의원은 자신이 낳은 다섯 자녀로도 모자라 23명의 위탁 자녀까지 돌보며 지난해 공화당 대선 경선에 출마했다.
언뜻 보면 미국의 성 평등 수준이 꽤 높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7월에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12년 미국의 15세에서 64세 사이의 여성 중 직장을 가지고 있는 비율은 62.2%로 34개 회원국 중 16위이다. 대부분의 북·서유럽 국가뿐만이 아니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보다도 낮은 수치이다. 올 10월 발표된 세계경제포럼(WEF) 조사에서도 미국의 성 평등 지수는 23위였다. 미국이 자국의 경제 규모에 비해 여성의 고용 평등 수준이 뒤처질 뿐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도 유리천장 여전
미국은 여자들의 학력도 높고 500대 기업 신입사원 여성 비율이 41%에 이를 정도로 여풍이 강력한 것 같은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걸까. 가장 큰 장애물은 ‘유리천장’이다. 우리도 그렇지만 미국 직장 여성들도 위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매우 좁다.
미국 법대 졸업생 중 여성은 절반에 가까운 47%에 달하지만 법률회사에서 파트너까지 오르는 여성은 20%에 불과하다. 연방법원 여성 판사 비율은 23%에 그치고 있다. 의대를 졸업하는 여성도 48%에 달하지만 의대 학장이나 교수에 임명되는 비율은 13%에 불과하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경영대학원(MBA) 졸업생의 37%가 여학생이지만 500대 기업 중 여성 최고경영자(CEO)는 4%에 불과하고 최고재무담당자(CFO)는 10%에 불과하다. 기업 3곳 중 1곳은 고위급 경영진에 여성이 한 명도 포함돼 있지 않다. 지난해 매킨지 컨설팅 조사에 따르면 기업 이사회 중 여성의 비율은 미국이 15%로 노르웨이(35%)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100대 기업 여성 CEO 비율도 유럽이 7%인 데 비해 미국은 2%에 불과하다.
미국 기업인 여성을 위한 비영리단체 캐털리스트가 2012년 포천지 선정 5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사회에 진출했다 해도 이사회 회장을 맡은 경우는 3.3%에 불과했다. 유리천장 벽은 유색인종 여성들에게 특히 높게 나타나는데 포천지 선정 500개 기업 중 3분의 2 이상 기업이 지난 5년간 이사회에 단 한 명의 유색인종 여성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답게 미국은 여성들이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적 메커니즘이 유럽에 비해 크게 뒤진다. 워싱턴포스트도 올 1월 15일자에서 미국의 낮은 여성 고용률에 대한 원인을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출산휴가와 같은 복지정책이 잘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남탓 하지말고 나를 탓하라
미국은 나라에서 지원하는 유급 출산휴가가 없다. 다른 복지 선진국들이 출산휴가 때 평균적으로 임금의 38%를 지원해 주는 것과 대조된다. 무급 출산휴가조차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 법으로 정한 기간이 12주(3개월)에 불과해 북유럽과 같은 복지 선진국들의 평균인 57.3주에 훨씬 못 미친다. 그나마 이것도 종업원 50명 이상 기업에만 해당한다. 이 정책이 도입된 것도 1994년에야 제정된 가족의료휴가법에 의해서이다.
유럽에서는 1∼5세 어린이의 90%가 정부 보조를 받는 보육시설 혜택을 보지만 미국 내 정부 지원 육아시설은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머지는 비싼 사립 보육시설에 맡기거나 개인적으로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정부 기관과 기업 이사회의 30∼40%를 여성 임원으로 채우는 쿼터제도 유럽에서는 이미 116개국에서 채택할 정도로 일반화됐지만 미국은 해당되지 않는다. 또 기혼 여성들이 큰 혜택을 볼 수 있는 재택근무제를 채택하는 기업이나 기관도 20∼30%에 불과하다. 그나마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재택근무제는 더욱 위축됐다.
미국 기업들이 이처럼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여성을 위한 지원에 인색한 것은 수익 지향적 기업 문화와 관련이 있다. 제니퍼 롤런드 예일대 경영학 교수는 “성과주의 문화가 지배적인 미국 기업은 여성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을 투자가 아닌 비용으로 본다”고 했다.
앞에 소개한 슬로터 교수는 “실적을 내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하는 직원을 좋아하는 미국 직장이 학부모 모임에 참석한다며 오후 3시에 퇴근하겠다는 여성 직원을 어떻게 바라보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케이 슈워츠 맨해튼 연구소 연구원도 “미국 여성의 성공 스토리를 관통하는 주제는 개인의 노력과 의지로 사회적 장애물을 극복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여성이 사회적으로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도달하려면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게 아니라 여성 스스로 갖고 있는 자신감 부족, 성공 의지 결여를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 같은 메시지를 설파하는 대표적인 인사로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 셰릴 샌드버그가 있다. 그는 올 초 펴낸 ‘뛰어들어라(Lean In)’에서 “여성과 남성 사이에는 ‘야망의 격차’가 존재한다”며 “외부 요인을 탓하기에 앞서 여성 내부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고 했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세계은행과 로런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 보좌관 등을 지낸 화려한 경력이 있으면서도 “자신감 부족에서는 나도 예외가 아니다”고 말하는 그는 “지금도 경영진 회의에 참석할 때 ‘내가 능력을 뛰어넘는 주제넘은 일을 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빠질 때가 많다”고 말하기도 했다.
IBM 최초 여성 CEO였던 버지니아 로메티도 수년 전 자서전에서 비슷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중간간부 시절 고위직에 갈 수 있는 이직 제의를 받았는데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는 것이다. 로메티는 “이직을 제의한 사람에게 ‘내가 그 위치에 갈 만한 경험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생각해보고 연락하겠다’고 했더니 그로부터 ‘남자라면 그런 답변을 내놓지 않을 것’이라는 반응이 돌아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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