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상복의 여자의 속마음]<42>왜 ‘어장관리형 드라마’에 열광하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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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속 사내가 짝사랑해온 여자에게 선언한다. “나 지금, 너 차는 거다. 마주치면 인사하지 말자. 시간이 오래 지나도 ‘그땐 그랬지’ 하면서 추억인 척 웃으며 아는 척하지도 말자.”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묻는다. “우린 친구도 안 되는 거니?”

요즘 인기를 끄는 TV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봐야 알겠지만, 이 남자가 여자에게서 완전히 떠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 한다. 남성들은 이런 설정을 ‘어장관리형 드라마’라고 칭한다. 어장관리형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은 꽃미남들에게 둘러싸인다. 그중 한 남자와 사랑을 주고받되, 다른 남성에게는 관심이란 떡밥을 나눠준다. 관리를 받는 남성은 그녀 주위를 인공위성처럼 돌며 눈물겨운 헌신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역할을 맡은 조연배우가 남자주인공보다 높은 인기를 누리는 경우도 자주 있다.

“우린 친구도 안 되는 거니?”란 대사처럼, 많은 여성이 주변의 관심과 사랑을 끌어모아 늘 곁에 두고 싶어 한다. 그들에겐 두루 사랑받는다는 안정감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1세기의 사랑은 불안이라는 사막 위에서 자란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리퀴드 러브’에서 현대의 인간관계를 이렇게 분석한다.

“당신은 원하고 또 원하지 않는다. 고독한 당신은 관계를 갈망하나, 관계가 맺어진 당신은 자유를 갈망한다. 한 발은 관계에 두고 다른 발은 그 밖에 둔다. 그리하여 당신은 관계, 유대, 연대를 연결로 대체한다. 원할 땐 곧바로 소통하고 원하지 않을 땐 그 즉시 불통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에 접속한다.”

우리가 자주 쓰는 ‘휴먼 네트워크’라는 용어 또한 바우만의 지적대로, 원치 않을 때에는 ‘즉시 끊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디지털 유목민 사회에선 안정적인 관계가 해체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연인이 만나도 서로를 마주보는 시간은 의외로 많지 않다.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영화 혹은 뮤지컬을 관람한다. 마주보기에 익숙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두려워하는 인간 유형이 대량생산되고 있다. 경쟁과 불안에 시달리는 여성들에게 그래서, 최적의 현실 도피처이자 영혼의 안식처는 ‘최대한 많은 사랑’이다.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는 또 다른 헌신적인 사랑을 받기를 꿈꾼다.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그런 사랑을 갈망하며 열광하고 소비한다. 불가능함을 알기에 더욱 매달린다.

그러니까 ‘어장관리 드라마’는 그녀들의 과욕이나 허영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나날이 높아지는 현실의 불안을 상상의 위안으로나마 달래고 싶은 게 아닐까.

한상복 작가
#드라마#어장관리#관계#휴먼 네트워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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