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선한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 살았다 바다도 더 많이 찾아와 주고 진하게 놀다가는 별이 있는 하늘동네 갈라섰다 다시 만나는 사람 일처럼 만났다 갈라지는 것이 골목이 할 일이다 오르막은 하늘로 가는 길을 내어 놓고 곧장 가서 짠한 바닷길을 숨겨놓아 가끔은 외로워 보일 때도 있다
고깃배 타는 신랑을 물 끝으로 보낸 뒤 식당일로 밤늦게 귀가하는 기장댁 길 끝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없고 아랫동네에서 사업하다 부도 만난 박씨가 막다른 골목 셋방에 몸 부지해 살았다 왼 길에는 항운노조 간부를 들먹이다 힘에 겨워 스스로 생을 포기한 이씨가 남긴 어린 두 아이가 아버지도 없이 떠돌았다
사람 하나 겨우 빠져 나가는 샛골목은 어찌 보면 질러가는 길 같으면서도 몇 번을 아프게 굽이쳐 돌고 난 뒤에야 처음 길과 만났다 늙은 골목은 갈라졌다 다시 만나는 일로 환해지지만 담벽에 해를 그린 아이들이 떠난 뒤 구부정해지는 줄도 모르고 허허대며 숨어간 뒤에는 걸핏하면 나오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 막힌 길이지 싶다. 되돌아나갈 마음먹고 끝까지 들어가면 기역자 골목이 다시 열린다. 화랑들이 모여 있는 서울의 북촌, 서촌을 찾아갈 때마다 1970년대로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번쩍거리는 가게들이 늘어선 큰길을 조금만 벗어나면 어릴 때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한옥들 사이로 조붓한 골목길이 이어진다. 제멋대로 뻗은 미로 같은데 나무 잎맥처럼 조화롭고 자연스럽다.
나라 곳곳을 갈아엎은 도시 재개발 광풍 수십 년에 세월의 먼지가 켜켜이 쌓인 골목 풍경은 이제 쉽게 보기 힘들다. 공동체의 정겨운 소통공간을 쓸어내고 위압적 아파트를 세우는 것이 발전이고 성장이라 굳게 믿은 탓이다. 한데 변화가 시작됐다. 최근 서울 삼선동 장수마을은 낡은 집을 고치고 비탈진 골목을 재정비하는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동네가 산뜻하게 변했다. 주민들이 재개발의 이익을 포기하고 추억과 역사를 보전하는 도시 재생의 길을 선택한 덕이다.
산허리를 겹겹이 가로지른 부산의 산복(山腹)도로 주변도 개발 대신 지역 특색을 되살려 도시의 명물로 변했다. 6·25전쟁 이후 바다가 보이는 산동네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산복도로엔 궁핍한 삶의 애환이 스며들었다. 반세기 전 밤바다로 입항한 외국인들은 암흑 속에 산 하나를 통째로 밝힌 불빛의 향연에, 홍콩보다 웅대 장려한 해변 아파트가 한국에 있나보다 하고 잠시나마 놀랐다 전한다. 1977년 동아신춘문예 시 부문으로 등단한 강영환 시인은 40여 년 그곳에 터 잡고 살면서 ‘산복도로’ 연작을 썼다. “정 많은 사람들이 정이 그리워 떠나지 못하는 공간”이라 그가 말하는 ‘하늘동네’의 짠한 아름다움이 그 속에 온전히 담겨 있다. 사진가 강홍구 씨는 올해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그 풍경을 사진으로 보여줬다. 화면 가득 다닥다닥 붙은 집들, 가파른 골목, 아득하게 뻗은 계단에 치열한 삶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살풍경한 도시에 간혹 남아 있는 구부러진 골목길. 굴곡진 인생살이를 상징하듯 삐뚤빼뚤 이어진 길은 살갑게 다가와 도시의 삭막함을 잊게 만든다. 사람냄새 묻어나는 그런 풍경이 우리 곁에서 더는 사라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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