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김정은의 나홀로 도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17일 03시 00분


지난해 7월 25일 평양 능라인민유원지 준공식에 참석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놀이기구를 타고 즐거워하는 모습. 김정은 옆에 류훙차이 북한 주재 중국대사, 그 옆에 김경희 노동당 비서가 앉아 있다. 동아일보DB
지난해 7월 25일 평양 능라인민유원지 준공식에 참석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놀이기구를 타고 즐거워하는 모습. 김정은 옆에 류훙차이 북한 주재 중국대사, 그 옆에 김경희 노동당 비서가 앉아 있다. 동아일보DB
북한은 전쟁터이자 사냥터이다. 그 땅에선 인민만 생존을 위해 ‘전투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고위층의 스트레스도 엄청나다. 숙청이라는 ‘전투’를 주기적으로 치를 때마다 ‘전사’한 동료의 피는 낭자하다. 여느 전쟁보다 ‘전사자’ 비율은 낮지만 대신 전사하면 일가도 같이 멸족된다. 명예 같은 건 없다. 죽는 순간 시체는 햄스터처럼 동료들에게 뜯어 먹힌다.

2년 전 사령탑이 젊은 김정은으로 바뀐 뒤 고위층의 스트레스는 더욱 커졌다. 제일 먼저 찾아온 괴로움은 육체적 고통이었다.

늙고 병든 지도자일 땐 몰랐는데 젊은 김정은은 따라다니는 일부터 고역이었다. 김정은은 창전거리 아파트 건설장을 찾았을 때 계단을 두세 개씩 훌쩍훌쩍 걸어 올랐다. 군사분계선과 불과 350m 떨어진 해발 1242m의 까칠봉 초소도 단숨에 성큼성큼 올라갔다. 김정일이 아들에게 물려준 북한 지도부는 그런 김정은을 따르기엔 너무 늙고 병들었다. 2011년 김정일 사망 직후 노동당 정치국 위원 17명의 평균 나이는 78.5세였다. 북한의 평균수명은 세계 최하위권인데, 지도부는 최고령인 것이다. 80세 가까운 노인이 20대를 따라 걸으려면 죽기 살기로 걸어야 한다.

걸음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취향도 도저히 맞추기 힘들다. 북한이 지난해 7월 공개한 사진 한 장은 이를 잘 보여준다. 능라인민유원지를 방문한 김정은은 바이킹과 유사한 ‘회전매’라는 놀이기구를 탔다. 20대 김정은이 너무 즐거워할 때 그의 옆옆에 앉은 고모 김경희의 얼굴은 사색이 된 듯 보였다. 평생을 공주로 살았어도 생전 처음 타보았을 바이킹 위에선 김경희도 할머니였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김정은은 대외선전이 아무리 중요하다 한들 심혈관 질환이 심한 66세 고모를 무서운 놀이기구에 앉히고 좋아해야 했을까. 고모에게도 저럴진대 다른 연장자 간부에 대한 배려 따윈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어느 날 현지 지도에 나선 김정은은 숨이 턱에 걸려 따라오는 늙은 간부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힘들면 따라다니지 말고 집에서 쉬시오.”

해직 통보는 그렇게 예고 없이 다가왔다. 이 말을 들은 간부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간부들은 처음으로 “원수님을 위해 늙은 우리가 이젠 물러서야겠다”는 말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올해 초 김정은은 “앞으로 나와 10년 이상 일할 수 있는 사람들만 간부사업(간부승진) 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이 말 한마디에 북한의 모든 인사이동이 중단됐다. 군부도 이젠 소장(한국군 준장) 이하 간부는 50세 미만만 선발한다. 50세가 넘도록 장성이 되지 못한 수많은 고위 군관은 이제 군복 벗는 일만 남았다.

젊고 의욕이 넘치는 김정은이 거동도 말투도 느릿느릿한 늙은 간부들이 마음에 들 리 없다. 이들은 육체만 늙은 것이 아니다. 나라와 인민을 위한 고민도, 진취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이 자리에서 최대한 오래 버티려는 이유는 오로지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가문을 위해서다. 권력이 있을 때 일가친척을 최대한 힘껏 밀어주어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는 것이다. 간혹 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있지만, 성공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둘째는 가족을 밀어줄 만큼 높이 올라간 뒤엔 내려오기가 겁나서이다.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면 누가 와서 목덜미를 물어뜯을지 알 수가 없다. 은퇴한 자는 물론이고 1997년의 대규모 숙청 때처럼 13년 전 묻힌 김만금 전 농업담당비서 백골도 꺼내 부관참시하는 북한이다.

북한의 늙은 간부들에겐 전장에서 수십 년간 몸에 익힌 신조가 있으니 하나는 ‘아첨은 아무리 해도 모자란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머리 쳐드는 자는 총에 맞을 확률이 높으니 최대한 몸을 낮춰 기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김정은의 말 한마디에 “백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라며 골백번 조아리고 충성 자금을 많이 걷는 일에 두 발 벗고 뛰어다닌다. 물론 많이 챙길수록 그들의 몫도 커진다.

김정은이 아첨을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머리 쳐드는 자는…’ 하는 두 번째 신조를 싫어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사령관이 “앞으로”를 외쳤는데, 지금 북한에선 땅에 엎드린 늙은 부하들은 뛰어나가다 먼저 총에 맞지 않을지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김정은이 나이 든 간부들에게 화를 내는 장면은 여러 번 목격됐다. 인민에게 보여줄 성과가 절실한 김정은에겐 참으로 답답한 노릇일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은 하나는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핏줄 하나만 믿고 불쑥 튀어나온 자신이 지난 2년간 별 탈 없이 권력을 하나하나 장악한 데는 아버지의 유산인 ‘늙고 병든 지도부’가 일등공신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반항할 의지도, 행동할 힘도 없는 늙은 간부들은 하루라도 더 무사히 버틸 수 있다면 김정은의 발바닥도 핥을 준비가 돼 있다. 자녀들도 이미 충분히 기득권층에 포진시켜 놓은 이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무사히 은퇴하는 것뿐이다. 배부른 늙은 호랑이는 돼지를 사냥하는 일 따위엔 관심이 없다.

이제 김정은은 이들을 몰아내려 한다. 장성택 라인 숙청을 신호탄으로 내년에 대대적인 고령 간부 퇴진이 있을 예정이다. 김정은에겐 업적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시급하다. 경제도 살리고 싶고, 인민들의 찬사도 받고 싶을 것이다. 김정은이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젊은 간부들은 늙은 호랑이들의 포식을 부럽게 바라보며 이를 갈았던 ‘굶주린 호랑이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이 열심히 뛰어다녀 더 많은 먹이를 물어올 수도 있지만, 개중엔 화가 나면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낼 야생성도 남아 있다. 잘 길들여졌던 늙은 호랑이들을 빠르지만 허기가 져 있는 젊은 호랑이들로 바꾸려는 혈기왕성한 신참 조련사 김정은의 나 홀로 도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정은#고위층#늙은 간부#해직 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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