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창간된 영국 경제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220만 명의 전 세계 오피니언 리더가 읽는 권위지다. 하지만 FT는 2005년 ‘5% 룰’(상장사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투자자에게 자금 출처를 밝히도록 한 제도), 2006년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 2008년 한국 외채 문제, 2009년 한식세계화 비판 등 갖가지 현안에서 악의적이라 할 만큼 한국에 비판적인 보도를 일삼아 논란을 낳았다.
FT가 또 사고(?)를 쳤다. 11월 27일자 오피니언 면에 방공식별구역으로 첨예화된 동북아 영토갈등 기사가 실렸다. 작성자는 2002년부터 6년간 도쿄 지국장을 지낸 데이비드 파일링 아시아 담당 에디터. 그는 알베르트 델 로사리오 필리핀 외교장관과 만나 “집단 자위권 행사를 비롯한 일본의 우경화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를 우려하고 있다”는 말을 예상했으나 “주변국과 영토갈등을 빚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매우 환영한다”는 답이 돌아와 놀랐다며 한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도 마찬가지라고 보도했다.
소제목은 더 가관이다. ‘서울, 마닐라, 자카르타에는 2차대전 당시 일본의 침략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지만 이들은 모두 일본의 재무장을 환영한다(Memories of Japanese Invasion are raw in Seoul, Manila and Jakarta, but they would all welcome the country's rearmament)는 문장이 지면 한복판에 굵은 글씨로 박혀 있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뻔뻔한 태도만큼 분통터지는 일이 외신의 이런 보도 행태다. FT를 비롯한 주요 외신은 동북아 영토갈등을 중국과 일본의 대립으로만 규정하고 한국이 무조건 일본 편이라고 단정 짓는다. 이들의 일본 편향 보도는 중국의 급부상에 대한 경계감, 한국과 일본의 경제적 격차 등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선(禪), 다도, 꽃꽂이 등 일본 문화에 대한 서양의 오랜 동경 덕도 크다. 일본을 서구보다 더 근대화된 사회라고 치켜세운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과 같은 책만 봐도 알 수 있다. 북핵, 외환위기 등 부정적 이미지가 적지않은 한국과 대조적이다.
동북아 역사에 무지한 일반 외국인도 아닌 경력 23년의 중견 언론인이 한국이 일본의 재무장을 환영한다는 기사를 썼다는 점은 화가 나다 못해 실소(失笑)를 자아낸다. 하지만 화만 낸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국익에도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 정부의 대응이 많이 아쉽다. 외신의 부정적 보도가 있을 때마다 감정이 잔뜩 실린 데다 서투르기까지 한 영어로 반박문만 낼 뿐 본질적인 해결책, 즉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수차례 내한해 ‘한국의 최대 문제는 부정적 국가 이미지’라고 지적한 기 소르망 파리정치학교 교수는 “일본은 다국적 홍보회사를 고용하고 세계 곳곳에 일본 연구소와 장학재단을 만들어 국가 이미지를 끌어올렸지만 한국은 이런 노력을 않는다”고 꼬집은 바 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한 일도 아닌데 왜 안 하는 걸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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