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끝나자마자 상사로부터 걸려온 전화, “언제 사표 쓸거죠?”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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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여성시대]5부 해외편 일본<上>뜬구름 잡는 여성정책

12일 오전 11시, 일본 후쿠오카 시 텐진역 근처 커피숍에 평소 친분이 깊은 일본인 엄마 세 명이 모였다.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학교와 유치원에 모두 보낸 후 잠깐 차 한잔을 마시는 자리였다. 학력과 나이는 모두 달랐지만 결혼한 지 14년차, 아이가 두 명씩 있으며 맏딸이 모두 초등학교 4학년(10)이라는 점 외에 일을 하다 ‘원치 않은 계기로’ 그만두고 전업주부의 길을 선택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가와다 아코(가명·40)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CD와 악기를 파는 대형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다 비즈 등 수공예품 재료를 만들어 파는 건실한 중소기업에 입사했다. 뛰어난 영업력으로 전국 곳곳에 판매점을 확산시키자 회사는 그에게 입사 6년 만에 점장 제안까지 했다. 가와다 씨는 결혼 후에도 일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 직후 상사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한 번도 아니고 계속 전화를 걸어 ‘언제 그만둘 거냐’ ‘여자는 결혼하면 그만두잖아’ ‘어차피 그만둘 거, 빨리 사람을 뽑게 일찍 나가면 어때’라는 식으로 압박을 했어요. 임신한 것도 아니었는데….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혼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어요. 1년간 버텼지만 결국 제 스스로 못 견디고 2002년 9월 퇴사했습니다. 사표를 쓰러 갔더니 상사는 제게 사직서의 빈칸을 가리키며 ‘일신상의 이유로 그만둔다’고 자필로 쓰게 하더군요.” 이후 가와다 씨는 첫째 딸을 임신하면서 자연스레 전업주부의 길로 들어섰다.

보이지 않는 불평등

공과대학을 졸업한 사사키 게이코(가명·43) 씨는 1995년 건축설계회사에 입사했다. 300명 사원 중 여자 정사원은 두 명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 그의 이야기다.

“남자 동료 선후배들이 ‘여자가 다치면 안 되지. 어려운 일은 우리한테 맡겨’라며 힘든 일을 시키지 않더군요. 돌이켜보면, 역차별인데 당시에는 나를 배려해준다는 생각에 속으로는 고마워했어요.”

사사키 씨는 공장 내 자동전산화 프로그램을 설계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얼마 후 “모(母)회사로 파견을 보낼 테니 1년만 일하고 돌아오라”는 인사명령에 따라 파견근무를 했다. 1년 후, 원래 다니던 회사에 원대복귀를 하려하자 인사부에서는 “자리가 없어졌다”고 했다. 결국 사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주변 동료들은 “다른 곳으로 파견 보낸 뒤 자리를 없애, 여자들 스스로 사직서를 쓰게 하는 경우가 많다더라”며 수군댔다.

기자는 세 일본인 주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자들이 20대 후반∼30대 후반에 결혼 출산과 동시에 갑작스럽게 일을 그만두게 되는 ‘M자형’ 경력 단절 현상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 심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일본 내각부 산하 남녀공동참획국(우리의 여성가족부에 해당)의 2013년도 백서에 따르면, 결혼 전 직업이 있던 여성을 100으로 했을 때 직업을 유지하는 비율은 결혼을 하자마자 71.4%로 떨어지다 첫 아이를 출산하면 32.8%, 둘째를 낳은 뒤에는 23.1%로 급격히 추락한다. 결혼 전 일하던 여성의 열 중 여덟은 일을 그만둔다는 뜻이다.

“여성들이여 일을 해 주세요”

일의 질(質)도 달라진다. 결혼 전 직업이 있는 여성 중 64.2%가 정사원으로 근무하지만, 결혼 한 후에는 43.6%로 뚝 떨어진다. 첫 아이 출산 후 정사원 비율은 아예 19.8%, 둘째 출산 후에는 13.9% 등 10%대로 떨어진다. 반면 일본 남성은 20∼60대까지 노동인구가 일직선으로 유지되다가 은퇴 시점인 60세가 넘어서야 떨어진다.

일본사회정책 전문가인 기타큐슈대 신동애 교수(법학부 정책과학과)는 “여성고용이 ‘M자형’인 것도 문제지만 M자형이라고 해서 40대 여성이 출산 이후 다시 일터로 복귀한다고 보는 것도 오해”라며 “다시 일을 갖는 여자들은 시급(時給)이 매우 낮거나 근무환경이 좋지 않은 파트타임직으로 몰리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일본은 선진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관리직 여성비율도 11.1%(총무성 노동력조사)에 불과해 미국 43.1%, 유럽 평균 39%, 싱가포르 34%에 비해 매우 낮은 편. 상장기업의 여성임원 수도 1.2%에 불과하다.

‘남자는 바깥일을 하는 동안, 여자는 가정을 지킨다’는 말이 지금은 당연하게 들려도 일본 사회에 뿌리내린 것은 불과 30, 40년 전 일이다. 하세가와 노부코(長谷川 伸子) 젠더연구소 이사는 “1950년 이후로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남자는 밖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여자는 그동안 가사와 아이를 전담하는 ‘사회적 분업’이 이뤄졌다”고 했다. 국가가 생산성을 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성역할이 나눠진 셈이다.

일본 경제부흥을 외친 아베 정권은 ‘여성의 사회활동 없이는 성장이 없다’는 기치를 내걸고 다양한 정책을 내걸었다. 4월에는 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우리의 전경련), 경제동우회, 일본상공회의소 대표 등 기업인들을 대거 총리 관저로 불러 현재 아이가 만 1세 될 때까지 약 1년간 받을 수 있는 육아휴직 기간을 최장 3년으로 연장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기도 했다. 또 2020년까지 여성관리직 비율을 30%까지 끌어올리겠다면서 여성 전문직의 데이터베이스를 수집해 인재활용에 나서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런 정부의 정책에 냉소적인 의견이 적지 않다. 후생노동성 인증 사회보험노무사로 활동 중인 사자키 가즈코(佐崎 和子) 씨는 “여성고용을 늘리겠다는 ‘제도’는 이미 다 있었다. 하지만 일본 사회가 남녀를 불문하고 ‘일하는 시간’ 자체를 줄이지 못하면 변화는 절대 오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는 상담을 받으러 온 30대 초반의 아기 엄마와 함께 일자리를 찾아다녔던 일을 예로 들며 “남편 퇴근시간이 밤 10시인데 그동안 애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결국 일자리 찾는 것을 포기했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워킹맘들의 육아고통이 한국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처럼 헌신적으로 아이를 돌봐줄 친정엄마들이 없기 때문이다.

젠더연구소 하세가와 이사는 “3대가 농업이나 자영업을 하는 시골이라면 모를까, 수도권 지역의 젊은 엄마가 친정어머니 등의 도움을 얻는 건 어렵다. 이는 부모 자식 간이라도 성인인 이상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일본식 정서가 뿌리 깊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하는 여성이 맡길 곳은 결국 어린이집뿐이지만 보육교사의 낮은 임금과 믿을 만한 어린이집 부족으로 일본 사회도 고민 중이다.

육아휴직도 마음대로 쓰지 못한다. 대기업 경제연구소에서 연구직으로 일하는 유카리 씨(35)는 “임신도 하기 전에 회사에서 퇴출되거나 스스로 그만두는 여성이 일본에서는 지금도 많다. 육아휴직을 쓸 때까지 회사를 다니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아무리 정부가 나서서 독려해도 회사 입장에서는 모두 비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원치 않는다”고 했다. 일본 근로기준법 65조에 따르면, 임신 여성은 ‘출산 전 6주+출산 후 8주’의 휴가를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출산 전 6주는 현실적으로 쓰지 못하고 출산 후 2개월만 쓸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 출산 후 3개월을 보장받는 것과 대비된다.

일본은 또 한국처럼 대기업 중심이 아니라 300인 이하의 중소기업들이 이끌어가는 경제라는 점도 보육정책을 펴나가는 데 한계로 작용한다. 직원이 적기 때문에 여직원들의 출산 때문에 생기는 공백을 채우기가 어렵다. 기업들에 확실한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 이상 이윤을 따지는 기업이 출산과 육아를 겪어야 할 여성 근로자를 쓸 유인이 없는 셈이다.

가정에서 행복을

일본 여성들의 낮은 사회참여율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일본 여성 스스로 “여자가 결혼을 하면 일을 그만두는 것이 좋다”는 인식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외국계 금융사에 취업한 가네코 미키 씨(30)는 “여자 동료들 중에는 결혼 전까지만 회사를 다닐 것이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많다. 결혼을 한 뒤에는 ‘아내’로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을 뿐, 남자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회사를 계속 다니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엄마 세대도 그랬지만 젊은 세대도 이런 생각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실제로 기자와 인터뷰에 응한 대부분의 젊은 직장여성들도 “여자들이 좋은 대학이나 직장을 가는 이유는 좋은 남편감을 만나기 위한 면이 많다”고 했다. 앞서 소개한 사회보험노무사 사자키 씨도 “일본 여자들은 미혼모가 아닌 이상, ‘내 힘으로 벌어서 생활을 해 보겠다’는 의지가 많이 약하다. 남자 노동자들도 상담을 많이 해오는데, 아직 20대 후반밖에 안 된 청년이 ‘제 혼자 월급으로 신부를 먹여 살릴 수 있을지 너무 걱정된다’고 고민을 털어놔서 깜짝 놀랐다. 젊은 사람들이 아직도 ‘여자는 시집가면 가정주부로 일하고, 남자는 여자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는 뜻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도쿄·후쿠오카=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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