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민병선]‘놈’과 ‘빠’ 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20일 03시 00분


민병선 문화부 기자
민병선 문화부 기자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영화 섹션에는 누리꾼들이 자발적으로 영화에 평점을 매기는 항목이 있다. 10점 만점인 평점에서 대개 볼만한 영화의 경우 8∼9점이 나온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5점 미만은 거의 없다. 누리꾼 평점은 평론가의 그것보다 후한 경향이 있다. 평론가들의 까칠한 시선에 비해 누리꾼들은 조금 모자라도 “봐줄 만하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건 미국 평점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 지수’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누리꾼들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다룬 영화 ‘변호인’에 18일 오후까지 2점을 줬다. 이례적으로 낮은 수치다. 이는 노 전 대통령을 싫어하는 일부 누리꾼들의 ‘별점 테러’ 때문으로 보인다. ‘반(反)노무현’ 누리꾼들이 의도적으로 최저인 1점을 부여해 평균을 떨어뜨린 것이다.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변호인’은 ‘볼 가치가 없는 영화’가 돼 버렸다.

평점 2점은 평론가들이 이 영화에 매긴 7점과도 괴리가 크다. 평론가들은 영화의 완성도를 보고 평균 별 3개 반(다섯 개 만점)을 줬다.

영화 담당인 기자가 보기에도 평론가들의 평점은 합리적이다. 평론가 중에는 별 다섯 개를 준 ‘친노무현’도 없고, 별 반 개를 준 ‘반노무현’도 없었다.

영화는 변호사 노무현을 그리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판사를 그만두고 인권변호사로 나서게 된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돈 좋아하던 세무 전문 속물 변호사가 사회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갖게 되기까지가 이야기의 핵심이다. 정치인 노무현은 영화에 없다. 주인공 송강호의 연기도 칭찬받을 만하다.

18일 오후 5시에 개봉한 이 영화는 첫날 12만 명을 모으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노 전 대통령을 좋아하는 관객이 초반에 몰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초반 성적만 보면 대박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영화의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의도적으로 평점을 낮춰 다른 관객의 판단을 흐린 데 있다. 몇 년 넘게 영화를 준비하고 촬영하며 땀 흘린 감독과 스태프에게는 이런 평점이 달가울 리 없다.

일부 누리꾼의 별점 테러를 보며 논쟁은 없고 대결만 있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든다.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등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우리는 항상 ‘좋은’ 아니면 ‘나쁜’의 이분법을 써왔다. 공과 과를 평가하고 대통령이 집권한 시기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없었다. 시대의 담론을 이야기하기보다 개인에 대한 호불호가 전면에 등장했다. 그래서 지금 소위 ‘놈현’ 세력과 ‘노빠’ 세력만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는 “양 극단의 주장은 모두 거짓”이라고 했다. 진실보다는 자기주장을 관철해 이익을 챙기려는 의도가 극단의 주장을 낳는다고 했다. 냉탕과 열탕만 있는 우리 사회의 대결 구도에서 온탕의 미지근한 균형이 아쉽다.

민병선 문화부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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