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반드시 양 당사자가 있기 마련이고, 이 둘 간에 의미공유가 일어나야 한다. 상대에게 100% 양보하라는 것은 소통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양쪽 모두 ‘무엇을 양보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소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소통이 잘되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는 소통 후에 상대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소통 전에는 몰랐던 상대방의 생각 중 어떤 부분을 추가로 알게 되었는지, 내 생각 중 어떤 부분을 상대방이 추가로 알게 되었는지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의견이 다른 사람과 마주하는 것이 편안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일단 서로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이성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마주 앉아 이야기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나는 선, 너는 악’이라는 이분법이다. 인간은 모두가 불완전하다. 자기가 100% 선이 아님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소통을 이룰 수 있다.
소통이 집단으로 이루어지면 타협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집단 간 대립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의견 양극화가 더 심화되기 때문이다. 사회심리학 실험에서 사람들을 홀수 짝수 같은 아주 사소한 기준으로 나눠놓기만 해도 자기 집단에 자원을 더 많이 배분하려는 ‘내집단(ingroup) 편애’ 성향을 보이는데 하물며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집단 간에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작은 의견 차이로 시작되었던 갈등이 충분히 소통되지 않으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의견 차이가 커지면서 자존심 싸움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선순환 소통은 발전적 나선을 따라 점점 더 좋은 방향으로 커지지만 악순환 소통은 더 해결 불가능한 쪽으로 흐른다. 사실(fact)갈등이 정책갈등, 가치갈등, 자아갈등으로 깊어질수록 해결은 더욱 어려워진다. 만약 자아갈등 수준으로 깊어졌다고 생각되면 더 약한 수준의 갈등으로 전환하여 해결을 시도해 보는 것도 좋다.
흔히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 적으로 보이기 쉬운 것은 사람과 의견을 분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서양보다 동양에서는 ‘내 의견에 반대하면 나를 싫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더 크다. 그러나 ‘내 의견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이 적’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잠시 마음은 불편할 수 있지만 반대 의견도 경청할 때 대승적인 해결책도 나올 수 있다. 무엇보다 ‘저들도 나만큼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저들도 나만큼 힘들다’는 생각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관용의 정신이 우리 사회에 절실하다. 서로 상대에게 상처를 더 크게 줄 수 있는 말만 골라서 하며 스스로는 ‘힐링’ 받기를 원한다면 소통의 쌍방향성을 상실한 자기중심적 틀에 갇혀 더이상 발전을 기약할 수 없다.
천국과 지옥에 똑같이 양팔을 구부릴 수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어도, 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천국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한다. 양팔을 앞으로 뻗은 채 자기 입에만 먹을 것을 넣으려 하기보다 상대 입에 넣어주려 노력하는 것이 모두가 살 수 있는 상생의 길임을 빨리 깨닫고 실현하기 바란다. 권력이 있는 쪽의 ‘경청’은 특히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내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사람이 잘 들어주는 것보다 내게 뭔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내 말을 잘 들어줄 때 사람들의 마음은 더 크게 움직일 수 있다. 일단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많은 부분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듣는 귀를 열어놓는 것이 바로 초심을 유지하는 것이며 통합된 대한민국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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