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물화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섬뜩하게 느껴지겠지만 미술인들에게는 낯익은 주제인 바니타스(vanitas) 그림이다. 바니타스란 ‘구약성경’ 전도서에 나오는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단어로 해골, 촛불, 모래시계 등 시간의 흐름이나 소멸을 상징하는 사물을 빌려 삶의 유한함과 욕망의 허무함을 전하는 그림을 말한다.
독일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전통적인 바니타스 그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사진첩에서 발견한 흑백사진처럼 흐릿하고 모호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기법을 가리킨다. 비결은 사진으로 찍은 정물을 다시 붓과 물감으로 그리는데 흐릿한 사진과 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엷은 농도의 물감을 사용해 물체의 윤곽선을 분명하게 그리지 않고 부드럽게 스며들게 표현한다.
그 결과 익숙하지만 낯선, 보는 사람의 느낌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는 신비스러운 현대판 바니타스 그림이 탄생한 것이다. 법정 스님의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소리일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을 자신의 분수에 맞게 제대로 살고 있다면 노후에 대한 불안 같은 것에 주눅 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은 과거도 미래도 없는 순수한 시간이다. 언제 어디서나 지금 이 순간을 살 수 있어야 한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세월의 덧없음을 탄식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살 수 있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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