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도어벨의 경쾌한 울림과 함께 오늘 아침 이 땅의 모든 이에게 선물이 도착했다. 어느 지위에 있건, 어디에 살건, 부자와 빈자(貧者) 그리고 노소(老少)를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받은 선물이다. 주소불명이나 수취인 거부도 통하지 않는다. 달라진 도로명 새 주소로 단 한 사람도 빠뜨림 없이 찾아온 그것은 2014년 바로 일 년 치 시간이다.
새해 첫날이면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태양도 새삼 경건히 맞이한다. 시간의 인위적 매듭을 계기로 작년보다 나은 환경을 만들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어본다. 인터넷을 통해 지난해 말 빠르게 퍼져나간 글 하나도 목마름에서 나왔을 것이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기쁨은 더 줄어들었고,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됐지만 소중한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돈을 버는 법은 배웠지만 나누는 법은 잊어버렸다….’
예전보다 소득은 높아졌으나 심리적 행복도가 낮아진 한국 사회. 우리만 그렇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스위스 태생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현대인의 심리를 분석한 ‘불안’에서 “지금보다 더 나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느껴질 때, 대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나아 보일 때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고 썼다. 그런 사례로 1830년대 미국을 돌아본 프랑스 역사가 알렉시 토크빌의 분석을 인용했다.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양상이라도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 그래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사회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힌다.”
옛말에 그 예법을 살펴 그들의 정치를 안다고 했다. 한글학자 주시경은 “말과 글이 거칠면 그 나라의 일이 다 거칠어진다”고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말이 너무 거칠어졌다. 국회의 막장 폭언이나 집단이기주의가 대로(大路)로 몰려나와 소란을 피우는 일도 선진국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지금 겪는 소란과 혼란이 번영을 일군 사회가 치러야 할 홍역이라면 아직 우리에겐 희망이 남아 있다.
새해 첫 장을 열면서 복잡다단하게 얽힌 현실과 나의 시각을 조정해야 할 시간이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모두 적으로 볼 것인가, 희생과 소외가 없도록 서로의 좋은 이웃이 될 것인가. 내 식대로의 정의(正義)만 고집할 건가, 인간 존중을 먼저 생각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몽테뉴가 말했듯이 내가 나를 심판하는 법정에 자발적으로 서는 것, 그것이 선의(善意)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