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희균]전환하라 1994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일 03시 00분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지금보다 더 순수했고 덜 불안했던 1990년대. 이 시대에 대한 향수를 담아 인기를 끈 ‘응답하라 1994’의 마지막 내레이션엔 이런 구절이 있다.

‘지금은 비록 세상의 눈치를 보는 가련한 월급쟁이지만/이래봬도 우린 대한민국 최초의 신인류 X세대였고/폭풍 잔소리를 쏟아내는 평범한 아줌마가 되었지만/한때는 오빠들에게 목숨 걸었던 피 끓는 청춘이었으며/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아날로그와 디지털 그 모두를 경험한 축복받은 세대였다.’

1990년대 후반 대학을 다닌 필자에겐 딱 내 얘기다. 삐삐를 차고 대학에 입학해 2학년 때 시티폰, 3학년 때 휴대전화를 손에 쥐었다. 신입생 시절 갱지에 육필로 적어내던 리포트는 플로피디스크를 거쳐 시디롬에 담아 제출하면서 졸업했다. X세대라는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며 PC통신과 홍대 클럽을 넘나들었다. 외환위기의 후폭풍이 몰아치기 직전 가벼운 머리와 초라한 스펙으로 취업에 성공했으니 필자는 축복 받은 세대였는지 모른다.

이토록 화려했던 1994학번이 2014년 한국 나이로 딱 마흔이 되었다. ‘기득권을 가진 기성세대’ 즉 40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필자 주위의 40대들은 세상의 눈치를 보는 가련한 월급쟁이투성이다. 88만 원 세대가 아닌 정규직이라 해도 자신의 소득만으로는 전세 한 칸 얻기 힘들다. 이미 얻은 것(旣得)이 없으니 스스로 기득권이라 생각지 않는다.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아온 이들일수록 분노가 쌓인다.

1994 세대의 삶이 나날이 팍팍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소득의 상당 부분을 자녀 교육비에 쏟아 붓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유치원, 초등생, 중학생 자녀를 안고 있다. 거대한 사교육의 벽에 둘러싸인 시기다.

재벌의 후예가 아닌 이상 공부라도 시켜야 살아남을 거라는 불안감. 영어유치원에 다니는 옆집 아이는 해리포터 원서를 읽는데 동네 유치원에 다니는 우리 아이는 만화 주인공 흉내를 내고 있을 때의 갑갑함. 초등학교 5학년쯤 되어 슬슬 수학학원에 보내려고 알아보니 “5학년은 다 중학교 과정반에 다니고 있으니 3학년 반에 넣으시라”는 안내를 들을 때의 황망함. 교육이라는 괴물은 1994 세대를 ‘멘붕’에 빠뜨린다.

그렇다면 한 번쯤 전혀 다른 고민을 해봐야 한다. 1994 세대가 누린 고(高)성장기의 풍요로움은 이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다시 돌아오기 힘들다. 지난해 영국 정부의 한 산하기관은 현재 자녀 세대가 성인이 됐을 때 부모 세대에 비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 것이라고 했다. 중산층 가정의 자녀들도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 취업난, 대출 학자금 상환, 비싼 집값에 시달릴 것이라고 했다. 경제 위기로 ‘쪼그라든 중산층(The Squeezed Middle)’이 된 부모보다 자녀들은 더 가난해질 것이라는 진단이다.

공부를 통해 신분을 올리고 부를 쌓을 확률은 급속도로 낮아지고 있다. 이제 자녀 교육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좀 더 자신이 원하는 것, 그리고 잘하는 것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할 시기다. 세상이 좋아하는 틀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삶을 설계할 수 있도록 이끄는 길을 찾아야 할 때다.

기성세대로 진입하는 1994 세대들이 용감하게 자녀 교육의 패러다임을 전환한다면 정서적으로 풍요로운 21세기형 아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너덧 살 아이들에게 원어민 영어 강사를 붙이는 지인들을 보며 때때로 불안감이 드는 나 자신에게 거는 주문이기도 하다.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foryou@donga.com
#40대#월급쟁이#자녀 교육#중산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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