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시국춤꾼’에서 승무 인간문화재까지 이애주 전 서울대 교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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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으로 恨풀이 뿌듯… 민중 떠났다고 손가락질 받았으나 전통 연구”

이애주 전 서울대 교수가 목에 두른 스카프를 손에 감더니 즉석에서 승무를 추어 보이고 있다. 그 모습이 무척 진지하고 자연스러워 짧은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 그와의 인터뷰는 2013년 마지막 날 서울 동아미디어센터 사옥에서 이루어졌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이애주 전 서울대 교수가 목에 두른 스카프를 손에 감더니 즉석에서 승무를 추어 보이고 있다. 그 모습이 무척 진지하고 자연스러워 짧은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 그와의 인터뷰는 2013년 마지막 날 서울 동아미디어센터 사옥에서 이루어졌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인터뷰 전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권하자 이애주 전 서울대 교수(67)는 갑자기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 두 장을 손목에 감더니 승무를 추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 춤추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말이 아닌 몸으로 표현하는 데 익숙한 ‘춤꾼’은 저런가 싶었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종종 일어서서 춤사위를 보여주고 덩 딱 덩더쿵 장단을 쳤다. 짧은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

기자는 대학생 시절 그의 춤을 밖에서 본 적이 있다. 1987년 6·29선언이 나오기 사흘 전 서울대에서 열린 평화대행진 출정식에서였다. 광목 치마저고리를 입고 누웠다가 앉았다가 뛰어오르며 하늘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는 춤을 추던 그의 모습에서 춤사위가 사람 마음을 휘어잡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감옥에 갔어도 여러 번 갔을 것

민주화운동이 청년문화를 지배했던 당시 그는 요즘 아이돌에 비견될 정도로 문화계 스타였다. 그리고 27년이 흘렀다. 그는 홀연 떠들썩한 무대에서 사라졌고 기자는 오랜 시간 그의 근황을 듣지 못했다. 그러다 6, 7일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02-564-0269)에서 16년 만에 단독 공연 ‘천명(天命)’을 올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해 2월 서울대 교수직도 정년퇴임한 터였다. 시대도 변하고 사람들도 변했는데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왔을까. 아무래도 이야기 첫머리는 그때 그 시절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87년 6월 신문 사회면에는 ‘이애주 교수가 (거리 춤으로) 민주화운동의 불을 댕겼다’는 기사와 사진들이 쏟아졌었다.

“그해 1월 박종철(당시 서울대 재학)이 물고문으로 죽고 함께 문화운동하던 사람들도 다 끌려갔다. 연습실도 풍비박산이 나고 나 혼자 남겨졌다. 고문 받은 사람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처참하게 당하는 걸 보면서 허무와 절망, 왜 착한 사람들에게 모진 일이 닥치나 인간 본성의 문제까지 몰두하게 됐다. 어느 날 강의를 하는데 요령 소리와 함께 시끌벅적해 창밖을 보았더니 박종철 노제(路祭)였다. 수업하다 울고 말았다. 그 무렵 김민기 등으로부터 혜화동 연우무대 개관 공연을 부탁받았다. 마침 고민하고 있던 것을 춤으로 말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깊고 나직했다. 목구멍이 아닌 배 속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듯했다.

“그후 얼마 뒤 서울대 학생회에서 연우무대 공연을 대학본부 앞 광장(아크로폴리스)에서 하자고 했다. 87년 6월 26일이었다. 연우무대는 실내인 데다 좁아서 거의 제자리에서 춘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야외에서 추니 하늘 뚜껑이 확 열린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몸이 붕붕 날았다(웃음). 오후 1시에 시작했는데 2시에 끝났다. 학생들이 날 에워싸고 교문 앞까지 나가면서 거리로 뛰쳐나갔다. 나는 발바닥이 벌겋게 데어 절뚝거리며 집 앞 약국 가서 약 사서 바르고 오니까 TV에 내가 춤추는 게 나오고….”

1987년 7월 9일 연세대 이한열 장례식. 이 교수가 춤추는동안 그의 누나(오른쪽 아래)가 통곡하고 있다. 동아일보DB
1987년 7월 9일 연세대 이한열 장례식. 이 교수가 춤추는동안 그의 누나(오른쪽 아래)가 통곡하고 있다. 동아일보DB
그는 그날 이후 이한열(당시 연세대 재학), 조성만(서울대 화학과 학생으로 할복 투신 사망), 문송면(수은 중독으로 사망), 이석규(분신한 대우 노동자) 등 뜨거웠던 학원과 노동계 현장에서 거리 살풀이춤으로 원혼들을 달랬다.

“한열이가 최루탄 맞고 죽는 장면을 재연하면서 앞에 있는 삼베를 주욱 가르고 나가는데 한열이 어머니가 실신을 하고 누나는 ‘한열이가 왔다’면서 통곡을 했다(사진). 성만이 장례식 때에도 어머니가 갑자기 달려들어 ‘성만이가 왔다’고 울부짖었다. 내가 무당 역할을 한 건데… 춤으로 남들 한을 풀어준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국립대학, 그것도 서울대 교수가 그러고 다녔으니(웃음) 고생도 많았겠다.

“감옥을 갔어도 여러 번 갔을 텐데 괜히 건드렸다가 무슨 일 터질지 모른다는 분위기였다. 나중에 동료 교수로부터 ‘대학본부에서도 이애주를 건드리면 학생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여론에 밀려 물러섰다’는 말을 들었다. 안기부 같은 데서 협박은 말도 못하게 받았다.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는 것은 약과이고 차마 전할 수 없는 내용을 적은 편지, 전화를 계속 받았다. 아마 내가 정신이 약했으면 돌아버렸을 것이다.”

―87년 대통령선거 때는 민중후보추대위원장을 맡아 백기완 후보 지지 연설도 했다.

“유명인이 해야 한다 해서 떠밀리다시피 하게 됐다. TV에 나가는데 입고 갈 옷이 있어야지. 자연스러운 게 좋겠다 싶어 입던 그대로 천연염색한 자주 끝동 노랑 저고리, 남색 치마 무명옷을 입고 출연했더니 ‘북한 방송 아나운서 같다’ ‘빨갱이 아니냐’는 화살이 날아왔다.”

―민주화 세력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자리 제안도 제법 받았을 법한데….

“국회의원 나가라 이당 저당에서 연락이 왔고 새 당 만드는데 같이 만들자 제의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생길 때도 비슷한 생각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조직만 커지면 뭐하나, 더 공부하고 연구해서 기본 바탕부터 먼저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는 “사람들은 내가 민중과 민주를 떠났다고 손가락질했지만 사실 더 깊게 우리 민족의 사상과 전통 속으로 들어간 거였다”고 했다.

민주정권때 자리 제안 많이 받아

자신을 향해 “변했다”고 수군댄 사람들에게 한이나 분노도 많았을 텐데 이 전 교수는 단어 한마디 한마디가 혹 그들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신중했다.

자신의 내면과 춤 속으로 몰입한 그는 마침내 1996년 승무(중요 무형문화재 제27호) 인간문화재로 지정된다. 사실 기자는 이번에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그가 한국 전통춤을 집대성한 한성준과 그 수제자 한영숙(1989년 작고·승무 인간문화재)으로 이어지는 승무의 적통(嫡統)을 이은 인간문화재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현존하는 승무 인간문화재는 이매방 이애주 정재만 단 세 명이다. 이 전 교수는 또 살풀이춤(중요 무형문화재 제97호) 전수자이기도 하다.

이애주는 글을 깨치기 전 춤부터 깨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어머니 손에 끌려 당시 국립국악원 김보남 선생에게 맡겨져 승무 궁중정재 춘앵무 검무까지 익히게 된다. 이후 서울대 체육교육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문리대 국문학과에 학사 편입해 전통 민속춤에 대한 이론도 다진다. 1969년 첫 제자로 인연을 맺은 스승 한영숙은 제자의 ‘외도’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춤만 배울 것이지 이상한 패거리들과 어울린다고, 내색은 많이 하지 않으셨지만 좋아하지 않으셨다. 툭하면 연습장에 경찰이 들이닥치질 않나, 형사들이 찾아와 ‘이애주에게 뭘 가르쳤느냐’ 다그침을 당했으니 충격이 크셨지만 타계하실 때는 모든 걸 이해해 주셨다.”

그는 1990년대 침잠하며 우리 춤 연구에 몰두했다. 고구려 벽화 춤에서 우리 춤의 원형을 발견하고 뿌리를 캐어 가다 영가무도(詠歌舞蹈·김항(金恒·1826∼1898)이 주창한 정역(正易) 사상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한 전통예술이자 수행법)까지 접하게 된다. 영가무도의 거의 유일한 계승자라고 알려진 박상화 선생과도 인연을 맺는다. 살풀이, 승무, 태평무 등 전통춤의 형식과 기교를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던 그가 기교와 형식의 한계를 뛰어넘은 ‘자연 춤’의 세계를 형성한 시기였다.

이야기는 동양춤과 서양춤으로 넘어갔다.

“우리 춤은 곡선적이면서도 온몸을 놀리는 몸, 마음, 영혼의 춤이다. 서양 춤은 직선적이면서 개체 개념의 집합이라는 점에서 건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춤은 내면으로 계속 쌓아가면서 추니까 몸짓 면에서 동양 서양 다 뛰어넘어 모든 것이 융합된 중심의 몸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어 “김연아나 손연재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들의 몸짓에 한민족 역사의 혼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남들은 짧은 동작으로 끝내는 것을 김연아는 길게 늘이지 않는가. 그건 단지 기교가 아니다. 영혼의 움직임이다. 마음을 이완시켜 주고 행복하게 해주니 사람들이 감탄을 하는 거다. 나는 손연재가 체조하는 거 보다가 다른 나라 1등 선수가 하는 것 보면 심심해서 못 보겠더라(웃음). 걔네는 흐름이 뚝뚝 끊기는데 김연아 손연재는 손 하나를 뻗더라도 좍 하는 연속적 부드러움이 있다. 강수진 같은 발레리나도 마찬가지다. 긴 호흡으로 유려하게 선을 그리니 유럽 사람들 마음을 흔들어 놓는 거다.”

60년 춤인생, 요즘이 제일 편안

그는 “싸이의 말춤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싸이 말춤은 천재적이다. 그 안에는 고구려 시대 말달리던 우리 민족의 유전자가 녹아있다. 세계가 열광하는 건 내면에 깃들어 있는 이런 에너지를 느끼기 때문이다. 정작 우리는 우리 것을 무시하고 연구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지, 내 존재가 무엇인지 깊이 들어가면 제2, 제3의 말춤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그게 바로 ‘창조’다.”

그는 “요즘이 제일 편안하다”고 했다.

“공연이 가까워오면서 이렇게 마음 편한 적이 없었다. 60년 넘게 춤을 추었는데 비로소 그냥 자연스럽게 추자는 마음이 일어나는 거다. 어차피 인생이나 춤이나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 아닌가.”

“춤을 통한 수행과 깨달음”을 말하며 한국의 전통사상과 수행법까지 종횡무진 대화를 이어가던 그에게선 언뜻 세속의 것을 떠나 영원과 본질을 추구하는 도인(道人)의 모습이 스쳤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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