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괴 살인, 간첩 테러 사건처럼 위급하거나 중대한 사건이 터져도 수사당국은 휴대전화 감청을 할 수 없다. 감청 장비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알고 있어서인지 간첩들은 난수표 대신 휴대전화로 북한 지령을 받는다고 한다. 마약 납치 강도처럼 점조직 형태로 이뤄지는 범죄는 대포폰 등을 이용해 수사를 교란하는 추세다. 활용도가 가장 높은 휴대전화(75% 이상)를 이용한 범죄에 우리 수사기관은 속수무책이다.
국회 정보위원장인 새누리당 서상기 의원이 이동통신회사에 감청 장비 구축을 의무화하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정부가 휴대전화 불법 도청 사실을 스스로 밝힌 2005년 이후 수사기관은 물론이고 이동통신사에도 장비가 없어 법원이 영장을 발부해도 쓸모가 없었다. 실제로 국가정보원은 2006년 일심회 사건 때 관련자의 휴대전화에서 북한 지령문 흔적을 발견하고도 감청할 수 없어 증거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미국은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1994년 CALEA법으로 민간업자의 휴대전화 감청 장비 구축을 의무화했다. 알카에다 테러조직의 수장인 오사마 빈라덴 사살 작전의 결정적인 단서를 입수한 것도 휴대전화 통화 분석 덕분이었다. 독일은 1995년 전기통신감청법으로 감청을 법제화했고 호주, 네덜란드, 영국이 뒤를 이었다. 우리도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시절 국회에서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현실화하지 못했다.
우리 국민은 국정원의 과거 불법 도청 전력 때문에 합법 감청에도 거부감이 강하다. 그러나 개정안은 감청 사실이 자동으로 기록되고 삭제되지 않도록 했으며 전용선을 통해 암호로 전달해 유출을 막는 장치로 불법 도청 방지와 사생활 보호를 강화했다. 무엇보다 법원의 역할이 중요하다.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 우리 법원은 감청영장 발부율이 너무 높다는 지적이 있다.
야당 일각에서도 테러나 흉악 범죄에까지 휴대전화 감청이 불가능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 여야는 불법 도청이나 감청의 오남용을 막고 인권과 사생활 보호 강화를 위한 생산적인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법이 마련돼도 장비를 도입해 시행에 들어가자면 오랜 기간이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