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과 증산교주 강일순(1871∼1909)은 같은 고부 땅(현 정읍시)에서 살았다. 둘 다 양반이었지만 살림살이는 보잘것없었다. 전봉준은 동네서당 훈장을 하거나 묏자리를 잡아주면서 그럭저럭 끼니를 이었다. 강증산도 어릴 때부터 남의집살이를 하거나 땔나무를 시장에 내다 팔며 겨우 입에 풀칠을 했다.
강증산은 전봉준의 열렬한 팬이었다. “전봉준은 만고의 영장”이라고 주위에 이야기하고 다닐 정도였다. 나이도 전봉준이 열여섯 위였다. 하지만 서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살았는데도, 두 사람은 전혀 만난 흔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봉준이 들떠 일어났을 때, 강증산은 피 끓는 스물셋이었다. 한데 강증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드러내놓고 전봉준의 무장투쟁에 반대했다. 썩은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데는 뜻을 같이했지만, ‘그러려면 땅과 하늘의 질서를 송두리째 뜯어고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강증산은 동학군들에게 “겨울에 쫓겨서 죽을 것”이라며 빨리 빠져나오라고 설득했다. 동학군 지휘부에는 “무고한 백성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뜨리지 말라”고 외쳤다. 실제 강증산의 제자 중에는 공주 우금치 전투 직전 이탈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동학접주 김개남(1853∼1894)과 의병장 임병찬(1851∼1916)은 친구 사이였다. 김개남의 ‘개남(開南)’은 ‘남조선을 개벽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그는 열혈남아로서 불꽃처럼 살았다. 전봉준의 말도 듣지 않았다. 그는 남원부사 이용헌 등의 목을 가차 없이 베었다. 그의 부대가 가는 곳마다 피바람이 일었다. 당시 양반관료들에게 그는 ‘공포’ 그 자체였다.
선비 임병찬은 김개남과 이웃마을에 살았다. 평소 그들은 밤을 패어가면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김개남이 청주성 공격에 실패하고 매부 집에 숨어들었을 때, 임병찬은 사람을 보내 “자네가 있는 곳보다는 회문산 자락인 우리 집(정읍시 산외면 종송리)이 높고 험하니 더 안전한 이곳으로 와 있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전주감영에 ‘김개남을 잡아가라’고 알렸다.
김개남은 1894년 12월 임병찬의 집에서 잡혀 전주남문 밖에서 목이 베였다. 1905년 의병장 임병찬은 일본군에 체포돼 그의 스승 최익현과 대마도에 유배됐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도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거문도에 유배되자 그곳에서 단식 끝에 눈을 감았다.
강증산은 전봉준이 교수형을 당한 뒤 14년을 더 살았다. 그는 “전봉준은 진실로 백의한사(白衣寒士)로 일어나서 능히 천하를 움직였다. 감히 그의 이름을 해하지 말라”고 말했다. 반봉건 반외세의 무장혁명을 꿈꿨던 전봉준, 우주 삼라만상의 후천개벽을 꿈꿨던 강증산, 그들은 방법은 달랐지만, 그 뜻은 같았다.
김개남과 임병찬은 그 뜻부터가 달랐다. 김개남에게 ‘백성은 사발이고, 왕과 조선지배층이 물’이었다면, 임병찬에겐 ‘왕이 사발이고, 백성은 물일 뿐’이었다. 임병찬에게 동학군은 임금에게 반기를 든 ‘동학비도(東學匪徒)’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에겐 ‘우정’보다 임금에 대한 ‘충(忠)’이 먼저였다. 선비로서 당연했다. 그가 ‘임실군수와 백미 20섬’의 포상을 사양한 것도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1879∼1910)가 ‘동학당 사태는 폭동(동양평화론)’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뜻일 것이다. 그의 아버지 안태훈과 함께 황해도 동학군 토벌대로 나선 것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안태훈은 당시 황해도 ‘아기접주’로 이름이 자자했던 김창수(백범 김구·1876∼1949)를 치지 않았다. 그는 열여덟 소년접주에게 밀사를 보내 ‘서로 공격하지 말자’라고 제의했다. 그리고 김창수가 해주성 습격에 실패하고 쫓길 땐 그를 상당 기간 숨겨주기까지 했다. 그는 ‘충(忠)’보다는 ‘사람’을 먼저 아꼈다.
1894년 갑오년 그 후 두 회갑. 사람의 길은 참으로 어렵다. 도대체 무엇이 정답인가.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희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구한말, 과연 힘없는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어야 했는가. 2014년 갑오년은 그때와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가. ‘가마니 들것’ 위에 호송될 때조차도 당당하고 눈이 형형했던 조선 사내, 녹두장군. 그의 붉은 마음은 아직도 애틋하고 절절하기만 하다. ‘봉준이 이 사람아,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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