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13세기 중동에 나스레딘이란 ‘이슬람의 현자(賢者)’가 살았다. 하루는 아이들이 호두가 든 봉지를 들고 찾아와 그에게 나눠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신의 방식으로 나눠줄까, 인간의 방식으로 나눠줄까”라고 물었다. 아이들은 ‘신의 방식’을 택했다. 한데 한 아이는 세 개, 다른 아이는 다섯 개를 받았고, 어떤 아이는 아예 한 개도 못 받았다. 아이들이 볼멘소리로 투정을 부리자 그가 입을 열었다. “균배는 인간의 분배 방식이지. 신은 균등한 분배를 하지 않아. 그것이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방식이야!”
‘행복한 바보’로 알려진 나스레딘의 우화에는 우리의 예측을 빗나간 결말이 담겨 있다. 최근 종교학자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의 글을 접하면서 ‘신의 방식’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고르게 나누는 균배가 실현된 세상에선 달라는 일도, 주는 일도 고민할 거리가 없다. 따라서 주고 싶은 마음도 없어지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 가질 필요도 없겠다. 시샘할 일, 미워할 일 없는 대신 연민도 자비도 사랑도 사라지는 세상이다. 호두를 동등하게 받지 못한 상태에서도 재미있게 놀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아이들, 바로 인간의 몫이란 게 원로 학자의 해석이었다.
이는 이슬람을 넘어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도 통한다. 불교에선 너와 나를 편 가르는 분별심을 내려놓고 모든 생명을 존중하라고 이른다. 세상 모든 것은 연결돼 있으며 우리는 부분이면서 전체로 존재한다는 의미다. 미국의 마틴 루서 킹 목사는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이라고 말했다.
새해를 맞아 습관적으로 ‘나’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소망을 비느라 분주했다. 남을 위한 기도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기여는 생각조차 못하고. 그래서 문정희 시인의 ‘비망록’을 떠올려 보았다.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이지만 굳이 연시(戀詩)의 좁은 틀에 가둬둘 필요는 없지 싶다. 자기 위주로 남을 판단하고 세상을 재단하는 이기적 욕망으로 망가지는 것이 어디 남녀 관계뿐이랴. 이 시와 더불어 운보 김기창(1913∼2001)의 생동감 넘치는 그림 ‘태양을 먹은 새’(1968년)를 독자 여러분의 밝고 희망찬 해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나누고 싶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송년미사에서 “한 해 동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았는가, 남을 돕기 위해 보냈는가 되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지금 어떻게 쓰고 있는지 반성을 촉구한 것이다.
다시 올해의 끄트머리에 섰을 때는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 ‘한 해 동안 다른 사람을 보살피며 살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장을.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