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윤상호]영웅을 기억하는 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15일 03시 00분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 장면 1.

“아드님의 고귀한 희생은 온 국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쉴 것입니다….”

1982년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여름휴가를 반납하고 밤새워 255통의 편지를 썼다. 포클랜드전쟁에서 숨진 영국군의 유족들에게 부칠 위로편지였다. 주위에선 총리의 바쁜 일정과 건강을 걱정하며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며 말렸다. 인쇄된 편지지에 서명을 해서 보내라는 건의도 있었다. 하지만 ‘철(鐵)의 여인’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모든 전사자의 이름을 자필로 꾹꾹 눌러 쓰면서 편지를 모두 작성했다. 그것이 하나뿐인 목숨을 나라에 바친 장병과 유족들을 위한 군 통수권자의 최소한의 도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대처의 리더십은 영국 국민을 감동시켰고, 국내외에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다.

# 장면 2.

2011년 8월초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컴컴한 새벽하늘을 날아 델라웨어 주 도버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의 공격을 받아 숨진 미군 전사자 귀환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2009년에도 만사를 제쳐놓고 이곳으로 달려와 아프간의 미군 전사자 유해를 직접 맞이했던 터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국방장관 합참의장과 함께 꼿꼿한 자세로 수송기에서 내려진 유해가 실린 컨테이너를 향해 최고의 예를 갖춰 거수경례를 했다. 이어 기지 내 대기실을 찾아 유족들에게 진심어린 위로를 전했다. 국가에 헌신한 영웅을 기리는 ‘하나 된 미국(One America)’은 전 세계에 깊은 감동을 줬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장병과 유족을 극진히 예우하는 군 통수권자의 모습은 이념과 정파를 초월해 국민과 국가를 결집하는 힘을 발휘한다. 군 통수권자의 이런 모습은 국가위기 때 더 빛을 발하고, 국난 극복의 원동력으로 승화된다.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 위협으로 안보위기를 겪고 있는 대한민국의 군 통수권자들은 어땠나 되돌아본다. 2002년 6월 29일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지키던 해군 장병 6명이 북한 경비정의 기습을 받아 전사하는 제2연평해전이 발생했다. 하지만 그해 합동영결식을 시작으로 2011년 9차례의 기념식까지 군 통수권자는 불참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교전 다음 날 한일 월드컵 결승전에 참석하기 위해 환하게 웃으며 일본으로 출국했다. 군 통수권자가 외면한 영결식에 국방장관이나 합참의장 등이 참석할 리 만무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재임 중 단 한 번도 기념식장을 찾지 않았다. 청와대 관계자를 보내 메시지를 전하거나 헌화나 분향을 한 게 전부였다. 좌파정권이 북한 김정일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전사자와 유족들을 홀대한다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었다. 유족들은 “내 아들과 남편이 목숨 바친 대한민국은 어디 있느냐”며 피눈물을 쏟았다.

이명박 정부 들어 전사자와 유족에 대한 예우와 배려가 미흡했다는 지적에 따라 6주년 기념식부터 정부 차원의 행사로 격상했다. 하지만 이 전대통령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도발 이후 10주년 기념식부터 군 통수권자로 처음으로 참석했다.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영웅들을 기리는 자리에 군 통수권자가 오기까지 강산이 바뀔 만큼 긴 시간이 걸린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천안함 폭침 3주기 추모식에서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분들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늦게나마 조국에 헌신한 영웅들을 예우하는 풍토가 뿌리내리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나라를 위해 희생한 장병을 기리고, 남겨진 가족들의 아픔을 헤아리는 것은 시대와 이념을 초월한 국가와 국민의 책무라고 본다. 이는 우리 삶의 터전인 사회공동체를 지탱하는 핵심가치이자 근본원칙이기 때문이다. 그 가치가 훼손되고, 원칙이 금간 국가와 사회는 더는 존재할 명분과 이유를 찾기 힘들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 역설했다. 영웅들의 희생을 망각한 국가와 국민의 운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2014년은 대한민국이 ‘영웅을 기억하는 나라’로 자리매김하는 원년(元年)이 되길 기원해본다. 그것은 북한의 도발을 막고 국격(國格)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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