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한기흥]윤치호의 애국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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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 문희의 말로는, 자기가 다니는 학교의 상급반 학생은 일본인 교사들을 ‘거지’라고 부르고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는 걸 싫어한단다. 어린 소녀들 한 패가 학교 뒤편에 조선 독립을 기원하고자 조각상 하나를 세워 놓았으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교실 안에서 일본인 교사들 몰래 만세와 애국가를 부른다고 한다.” 윤치호(1865∼1945)가 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10월 29일 일기에 쓴 내용이다. 그는 이틀 뒤 일기에선 “동네에서 천장절(일왕의 생일)에 일장기를 단 집은 우리 집뿐이었다”고 적었다.

▷윤치호는 한국 근대사에 빛과 어둠을 깊이 남겼다. 17세 때 일본 도진샤(同人社), 21세 때 중국 상하이 중서서원(中西書院), 24∼29세 때 미국 밴더빌트대와 에모리대에서 공부한 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귀국 후 독립협회 회장, 대한자강회 회장, 대성학교 교장을 지내며 민족의 힘을 키우기 위해 힘썼다. 1912년 일본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인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돼 3년을 복역했다. 그러나 차츰 친일로 돌아서 만년엔 국방헌금 기탁, 친일 강연 활동,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고 중추원과 조선임전보국단 고문으로 일본에 적극 협력했다.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인 혜문 스님이 어제 미 에모리대에 1907년 윤치호가 한글로 애국가를 쓰고 서명한 문서가 보관돼 있다며 100인 환수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애국가는 작곡가가 안익태라는 것 외에 작사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었다. 윤치호 작사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일부 나왔지만 도산 안창호가 작사자라는 설도 만만치 않다. 훼절한 친일파와 소신을 안 굽힌 독립운동가 중 누가 애국가를 작사했을까.

▷헌법재판소는 2004년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 확인 결정에서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건 관습헌법에 해당한다며 ‘태극기, 무궁화, 한글, 애국가도 관습헌법으로 국기, 국화, 국어, 국가의 지위를 갖는다’고 했다. 작사자가 누구든 애국가가 국가라는 데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윤치호#친일#애국가#작사자#안익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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