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거울의 방’이다. 낮에는 크게 눈에 띄지 않지만 해 질 녘에 진면모를 알 수 있는 곳이다. 어둠이 내린 베르사유 정원에서 바라보면 17개의 대형 거울에 비친 화려한 샹들리에와 천장화가 어우러진 빛이 눈부실 정도다.
그러나 ‘거울의 방’은 프랑스인들에겐 치욕적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1871년 독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이 방에서 첫 독일 황제로 즉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대관식을 열었다. 거기에 알자스로렌 땅까지 빼앗긴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복수심을 키워 왔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선전포고를 했을 때 프랑스에서는 오히려 환호성이 들릴 정도였다. 젊은이들의 자원입대도 줄을 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전장에서 맞닥뜨린 건 20세기의 가공할 무기였다. 1분에 600발의 탄환을 뿜어대는 기관총, 비행기에서 쏟아지는 폭탄, 화학무기…. 5개 대륙에서 6000만 명 이상의 군인들이 참전해 1000만 명 이상이 죽은 1차대전은 ‘위대한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살육기계가 전쟁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꿨을 뿐 아니라 20세기 전체를 지배한 국제질서를 낳은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올해 1차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아 유럽에선 많은 기념행사가 펼쳐진다. 6월 28일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당한 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공식 기념식이 열린다. 8월 3일에는 독일과 프랑스의 정상이 알자스 지방의 참호 속에서 죽어간 전사자들을 추모할 예정이다.
그런데 연초부터 “2014년의 정세가 1914년과 닮았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역사학자인 마거릿 맥밀런 교수(옥스퍼드대)는 저서 ‘평화를 끝낸 전쟁(The War That Ended Peace)’에서 1차대전의 원인으로 강대국 독일의 부상, 내셔널리즘의 발호,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복수심, 오랜 평화로 인한 전쟁에 대한 무감각 등을 꼽았다.
강력한 ‘통일 독일’의 등장은 유럽에서 늘 경계의 대상이 돼 왔다. 20세기 초반에 이어 독일은 다시 유럽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떠올랐다. 남유럽에서는 “독일이 유로존 위기를 틈타 세 번째로 유럽 대륙을 망치려 한다”며 민족주의 감정을 키우고 있다. 독일은 예전처럼 군사력은 아니지만 재정개혁 요구를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그리스 같은 나라는 한순간에 파산시켜 버릴 수 있는 경제 권력을 갖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견제가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맥밀런 교수는 현재의 중국을 1차대전 당시의 신흥 강국 독일에, 당시의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구 강국은 현재의 미국과 일본에 비유했다. 중국의 급부상은 힘의 균형을 깨려 하고 있고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은 중국과 한국에서 일본에 대한 복수심을 자극하고 있다. 여기에 북한 김정은 정권의 좌충우돌은 언제든 화약고에 불을 붙일 ‘세르비아의 총탄’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100년 전과 가장 큰 유사점은 누구도 ‘실제로 전쟁이 날 수 있다’는 점을 상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1차대전 당시 유럽도 근 100년간의 평화를 만끽했고 금융 운송 통신의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됐다. 영국의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마치 ‘몽유병자’들처럼 유럽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1차대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말했다. “우리는 과연 100년 전의 몽유병자들과 달리 깨어 있는가?” 새해 어지러운 주변 정세를 보며 떠오른 궁금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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