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11>어느 밤의 누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2일 03시 00분


어느 밤의 누이
―이수익(1942∼ )

한 고단한 삶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혼곤한 잠의 여울을 건너고 있다.
밤도 무척 깊은 귀가길,
전철은 어둠 속을 흔들리고…
건조한 머리칼, 해쓱하게 야윈
핏기 없는 얼굴이
어쩌면 중년의 내 이종사촌 누이만 같은데
여인은 오늘 밤 우리의 동행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어깨에 슬픈 제 체중을 맡긴 채
송두리째 넋을 잃고 잠들어 있다.
어쩌면 이런 시간쯤의 동행이란
천 년만큼 아득한 별빛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잠시 내 어깨를 빌려주며
이 낯선 여자의 오빠가 되어 있기로 한다.
전철은 몇 번이고 다음 역을 예고하며
심야의 지하공간을 달리는데…


윤기 잘잘 흐르는 머리칼, 복숭앗빛 뽀얀 얼굴의 아가씨가 심야 지하철에서 모르는 남자의 어깨에 제 체중을 맡긴 채 세상모르고 잠들었다면 보기에 참 걱정스럽고 심란할 테다. 그 남자도 고주망태가 된 아저씨나 꾀죄죄한 할머니가 몸을 기대는 것보다야 낫고, 흐뭇할 수도 있을 테지만 민망할 테다. 그런데 ‘건조한 머리칼, 해쓱하게 야윈/핏기 없는 얼굴’의 중년여인이 화자 어깨에 기댄 채 ‘혼곤한 잠의 여울을 건너고 있다’. 조신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토록 고단한 노동의 하루를 보낸 것이다. ‘밤도 무척 깊은 귀가길’, 그 여인의 집은 아마 지하철 종점에 가까운 서울 외곽일 테다. 집에 돌아가면 지친 몸으로 밥 한 술 뜨고, 살림을 건사한 뒤에야 눈을 붙일 테지. 그리고 새벽 첫 전철이나 두 번째 전철에 몸을 싣고 일터로 향할 테다. 새벽 전철에는 말끔히 화장한 얼굴로 큰 가방을 무릎에 놓고 앉은 아주머니들이 잠들어 계시더라. 그녀들이 가장 깊고 편한 잠을 잘 수 있는 지하철 출퇴근 시간. 승객 드문 새벽과 심야여서 앉을 자리가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내 고단한 누이여, 쉬어라, 내 어깨에 기대 쉬어라. 모르는 여인의 삶의 무게에 화자는 어깨보다 더 저려 오는 마음으로 잠시나마 ‘오빠가 되어 있기로 한다’. 심야 지하철의 서글픈 풍경이 따뜻한 서정으로 그려져 있다. 한 지하철을 타고 있는 우리는 모두 ‘천 년만큼 아득한 별빛 인연’이라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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