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 출신 어느 공기업 사장이 한 외국인 최고경영자(CEO)에게 훌륭한 경영자의 조건을 물었다. 외국인 CEO는 “매니저(관리자)와 리더(경영자)의 차이를 아느냐”며 이렇게 말했다.
“매니저는 문제가 발생할 때 솔루션을 찾는 사람이다. 리더는 두 가지를 더 갖춰야 한다. 비전을 제시하는 능력과 조직원들을 설득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키는 능력이다.”
리더는 결국 소통을 잘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비전을 마련하고 조직원들이 이 비전을 따르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변화무쌍한 시장을 다루는 경제계의 리더는 특히 소통 능력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2010년대 세계 최고의 경제 리더로는 단연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을 꼽을 수 있다. 8년의 임기를 마치고 이달 말 퇴임하는 그는 2008년 금융위기에서 세계경제를 구해낸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그는 97년간 유지된 연준의 ‘비밀주의’를 깨고 정례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연준의 향후 통화정책 방향을 시장에 미리 알려주는 포워드 가이던스(선제적 안내)도 도입했다. 세계경제가 요동칠 때 비전을 제시하고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한국에서도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4년의 임기를 마치고 3월 말 퇴임한다. 김 총재는 천재 경제학자이자 ‘워커홀릭(일 중독자)’으로 유명하다. 2010년 3월 김중수 당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가 한은 총재에 내정됐다는 소식에 한은 임직원들이 주변에 김 총재에 대해 묻고 다녔다.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누군지 궁금해하지 말고 오기 전까지 푹 쉬고 있어라.”
부지런한 김 총재는 한은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변화와 개혁을 기피하는 한은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 면모는 “한은 총재의 존재감이 없다”는 경제 주체들의 불만에 묻혀 버렸다.
김 총재는 1997년 8월 조세연구원장을 맡은 이후 현재까지 여러 기관의 장 자리를 맡았다. 그는 매니저로서는 훌륭했을지 몰라도 시장을 이끄는 리더로서는 자질 부족 시비에 시달렸다. 특히 ‘불통’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수시로 말을 바꿔 일관된 비전과 메시지를 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2010년 9월 물가안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금리인상을 시사하고는 금리를 동결해 시장을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작년 4월에는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낮추면서도 정작 금리는 동결했다. 결과적으로 서민들이 고물가로 고통받을 때 물가를 잡지도 못했고, 금리인하로 경기회복세가 탄력을 받아야 할 때 불씨를 살리지 못했다.
“한은 총재가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면 사고가 나지 않겠는가.”(기자단)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 적 없다. 하지만 우회전 깜빡이를 켜 놓고 첫 번째 골목에서 우회전할 수도, 두 번째, 세 번째 골목에서 우회전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김 총재) 2011년 5월 기자회견에서 김 총재가 기자단과 주고받은 이 대화는 시의 적절한 금리조절이 경기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김 총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시장 참가자들에게 남겼다.
“요즘 미국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는 평가는 버냉키를 위한 ‘퇴임 훈장’이다. 떠나는 김 총재에게는 그런 영예가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다. 다음 달쯤 차기 한은 총재가 결정된다. 차기 총재는 납작 엎드린 시장을 벌떡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한국경제에는 매니저가 아니라 ‘리더형’ 총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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