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교수의 고구려 이야기]<3>광개토대왕의 22년 정복전쟁, 국가 발전 기틀 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8일 03시 00분


평균 지름 66m인 광개토대왕릉의 현재모습. 원래는 피라미드처럼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상단에는 신전에 해당하는 건물이 있었다. 사진작가 윤석하 씨 제공
평균 지름 66m인 광개토대왕릉의 현재모습. 원래는 피라미드처럼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상단에는 신전에 해당하는 건물이 있었다. 사진작가 윤석하 씨 제공

윤명철 교수
윤명철 교수
유목민들에게 영토는 ‘이동하는’ 것이다. 교통로는 선(線)이며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항구는 점(點)이다. 몽골 유목민과 동만주 수렵민, 대항해 시대를 연 유럽인들의 영토 확장 전략은 이 선과 점을 늘리는 것이었다. 농경민들에게 영토는 ‘정착하는’ 것이다. 곡물을 영글게 하는 농지는 면(面)이다. 농경국가는 이 면을 늘리기 위한 전략을 짠다.

고구려는 어땠을까. 양쪽의 전략을 혼합했다. 면을 지배했고, 선과 점은 전략적으로 간접 지배하거나 관리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른바 ‘네트워크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을 구축했기에 고구려는 ‘중핵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광개토태왕(대왕)은 최소한 6개의 전략 요충지를 장악하기로 했다. 압록강 하구, 경기만, 요동반도 남단,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 남부, 동해 중부해안, 북만주다. 이 가운데 압록강 하구는 이미 장악한 상태. 태왕은 나머지 5곳의 장악에 나섰다. 군사 작전이 시작됐다.

즉위 초기 예성강 일대와 강화도를 노린 범(汎)경기만 작전을 펼쳤다. 백제 수군을 무력화시키고 국제 항구를 봉쇄하려는 의도. 396년 고구려 함대가 대동강 하구를 출발했다. 서해 5도 해역을 경유해 경기만에 도착했다. 주력군은 한강을 거슬러 왕성(서울 천호동 일대)으로 진격했다. 일부는 인천만과 남양반도 상륙 작전을 개시했다. 이 수륙양면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경기만 일대와 서해 중부 해상권은 고구려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요동반도는 고조선(원조선)의 영토. 게다가 요동성과 안시성 일대는 동아시아 최대의 철광지대이다. 이 때문에 훗날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 항상 격전의 무대였다. 태왕은 402년 기병부대를 이끌고 현재 요서의 차오양(朝陽)인 숙군성을 점령했다. 이를 시작으로 지속적인 공략 끝에 다롄(大連)의 비사성과 창산(長山)군도 등에 해양 방어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또한 서해를 ‘고구려의 바다’로 삼았다. 410년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부여를 완전 정복했다. 이 모든 작전의 결과 고구려는 두만강 일대와 연해주 남부까지 영토로 만들었다.

남쪽으로도 내려갔다. 400년에 신라 구원이란 명분을 걸고 5만 대군을 발진시켰다. 군대는 신라 중심부를 거쳐 함안과 부산 일대까지 점령하였다. 물론 백제를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항구를 확보해 백제가 일본(왜)과 동맹을 맺는 걸 막고 교역망을 붕괴하려는 전략이었다. 더불어 동해 중부 해안의 항구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태왕은 북만주 지역에도 관심이 컸다. 398년 동류 송화강가에 살던 숙신을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평원과 초원, 삼림은 지경학적으로 고부가가치 지역이고, 명마와 담비가죽 등은 값비싼 무역 품목이었다.

태왕은 22년 동안 쉼 없이 정복 작전을 펼쳤다. 중국의 분열 상황과 지정학적인 위치를 활용하여 ‘해륙국가’를 완성시켰다. 육지와 해양이 만나는 항구 지역들을 확보한 후에 약화된 중국 지역을 상대로 화전양면 정책을 구사하였다. 그렇게 해서 정치, 외교, 군사 등에서 관계를 조정하는 명실공히 동아지중해의 중핵국가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군사작전에 대한 내용도 기록돼 있다. 396년 경기만 작전을 음각한 부분이다. 윤명철 씨 제공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군사작전에 대한 내용도 기록돼 있다. 396년 경기만 작전을 음각한 부분이다. 윤명철 씨 제공
태왕의 이런 전략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향후 국가 발전 정책을 수립하는 데 참고할 내용이 적지 않다.

우선 대부분이 해륙교통의 요충지라는 점이다. 경기만은 황해남북 연근해항로와 황해중부 횡단항로, 동중국해 사단항로의 교차점이며 한강 하구가 만나는 해륙 교통로의 십자로이다. 인천 송도 평택 등은 경제특구 지역이다.

요동반도도 비슷하다. 중국 정부는 다롄을 경제특구로 만들었고, 웨이하이(威海)와 동중국해까지 연결했다. 2012년에는 항공모함(랴오닝)을 취역시키면서 황해를 ‘내해’라고 공언하기도 했잖은가.

두만강 하구 또한 북한의 나선지구, 중국의 훈춘(琿春), 러시아의 하산을 연결하는 경제특구 지역이다. 러시아는 1860년 이후에 블라디보스토크 항에서 태평양 진출을 시도하다 러일전쟁에서 패배했다.

일본은 1920년대 만주 진출을 시도하면서 ‘일본해 중심론’과 ‘두만강 경략론’을 펴기도 했다. 중국은 나진항을 조차지 상태로 만들었고, 청진항에 해군기지를 건설할 예정이다. 중국의 동해 진출을 막으려면 우리로서는 동해중부에 거점지역을 만들 수밖에 없다. 동해경제특구가 추진되는 고구려의 영토였다.

중국 정부는 2002년 3월부터 5년 동안 동북공정을 추진했다. 동북공정은 과제의 내용과 진행 과정에서 확인하였듯이 역사 문제만이 아니다. 실상은 정치 문제이고 경제 문제이다.

장수왕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습니다. 무슨 이유에서 그랬을까요? 다음에는 장수왕의 평양 천도와 통일 정책에 대해 살펴봅니다.

윤명철 교수
#광개토태왕#군사 작전#영토#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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