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어나서 열 살 때까지 경북 경산군 반야월(현재는 대구)에 살았다. 그곳은 사과밭이 많았다. 국민(초등)학교 1학년 때는 규칙 관념이 부족했는지 한번은 집에 가서 놀자는 친구 꼬임에 교실 창문으로 가방을 던져놓고 도망친 적이 있다. 그 친구의 집은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사과밭의 저편 끝에 있었다. 아무튼 그 길을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돌아오는 내내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던 두려움만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많던 사과밭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지금 그곳은 아파트 천지로 바뀌었다.
반야월에서는 설이면 여러 집이 한데 모여 강정을 만들었다. 설을 앞두고 동네 구석에서는 ‘뻥’ 하는 소리와 함께 뻥튀기 장사가 밥을 튀겨 내고 아이들은 귀를 막으면서도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강정은 튀밥을 엿으로 뭉쳐 만든다. 한겨울 찬 바깥마당에서 판을 만들어 그 속에 튀밥을 넣고 끓인 조청을 부을 때 수증기가 피어나고 주위에서 아주머니들이 두런두런하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다. 과자라는 게 거의 없던 시절, 막 굳어진 뒤 반듯하게 잘라낸 강정은 얼마나 맛있던지.
명절이면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고향에 가셨다. 전남 벌교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영천에 가서 기차를 한 번 갈아타고 삼랑진에서 또 한 번 갈아타야 했다. 명절이라 기차 안은 통로까지 승객으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힘들게 좌석을 구했어도 염치없이 마냥 앉아서만 갈 수 없어 어린 나도 자리를 양보할 때가 많았다. 할아버지 집은 읍내에서도 한참 들어가야 했다. 나 또한 경상도 시골에서 건너왔지만 그런 시골이 없었다. 무엇보다 나로서는 놀 친구가 없었다. 그땐 어려서 꼬막 맛도 잘 몰랐나 보다. 아버지야 늘 들뜬 마음으로 고향에 가셨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초중고교는 모두 서울에서 나왔다. 어릴 적 서울 아이가 내려오면 그 새침데기 같은 말투가 거슬려 “서울내기 다마네기 맛 좋은 고래고기”라고 놀리며 쫓아다녔다. 내가 바로 그 서울내기가 됐다. 지난해 말 ‘밴드’ 덕분에 연락이 닿아 30여 년 만에 고교 반창회를 했다. 대학에 올라가면서, 또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흩어져 연락이 끊긴 친구가 많았다. 모두들 얼마나 반가워하던지 오십을 넘긴 친구들이 여자들처럼 수다를 떨었다. 이름도 가물가물했지만 얼굴을 맞대고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담임선생님까지 모시고 머리가 벗어져 가는 제자들이 큰절을 올렸다.
시답지 않은 개인사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다. 내 또래에는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어도 아버지 고향을 쫓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렇게 따지면 내 고향은 벌교다. 굳이 명절에 고향에 간다면 삼촌 고모가 계신 벌교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어린 시절 아름다운 추억은 모두 반야월에 있다. 그리고 40년 넘게 서울에 살았다. 내가 돌아갈 고향은 어디인가.
아버지의 이농(離農) 세대는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고향이 그리웠고 명절마다 고향에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농 세대의 자식들은 최소한 두 개의 고향을 갖고 산다. 고향에 대한 기억은 분산되고 고향 의식은 희미해진다. 따져보면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고향 의식이 희미해질수록 ‘우리가 남이가’ ‘우리가 남이당가’ ‘우리가 남이유’의 의식도 함께 희미해진다.
내게 새 정치와 헌 정치를 가르는 기준을 하나 들라면 ‘우리가 남인가’라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우리가 남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들고 싶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더 큰 우리를 만드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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