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일 전 변호사가 살아 있다면 영화 ‘변호인’에 대해 참으로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2010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30여 년간 김 전 변호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극단적인 애증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변호사, 정치인 입문을 도와 세상에 설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김 전 변호사는 생전에 노무현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를 정계로 이끌었던 자기 자신을 “역사의 죄인”이라 탓했다. 인간 노무현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가 결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개 주장을 폈다. 타계하기 얼마 전, 병문안을 간 필자에게 김 전 변호사는 자살한 노 전 대통령을 다시 거론하며 자신의 잘못을 탄식하기도 했다. 그런 노 전 대통령을 기리고 있다는 영화에 조역(영화 속 송우석 변호사가 가장 믿고 의지했던 선배 김상필 변호사)으로 나오는 자신을 봤다면 김 전 변호사는 뭐라고 말할까. 노무현 변호사 미화에 자신이 함부로 동원됐다고 일갈했을지 모른다. 아니면 변호사답게 영화 속 ‘사실’이 ‘진실’이냐고 조목조목 따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 영화를 본 1000만 명이 넘는 국민들에게, ‘노무현의 이중성’을 아느냐고 다시 한 번 열변을 토할 가능성이 크다.
역설일 수 있으나 노 전 대통령의 어제는 물론 오늘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만들고 있다. 전두환 군사독재체제에 저항하는 인권변호사 노무현의 모습이 영화의 전부라고 한다. 영화가 그 많은 관객을 끌어모은 힘은 강력한 권력자 전두환에 맞서는 시골 변호사 노무현의 힘, 바로 ‘정의감’일 것이다.
영화는 1987년의 일로 끝을 맺으나 정작 ‘노무현의 신화’는 1989년 12월 31일부터 시작되었다. 국회 5공화국 청문회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다 퇴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자신의 의원 명패를 집어 던지면서 노무현의 역사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명패 때문에 무식한 이미지를 얻었다”고 사뭇 겸손해했으나 그것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반사이익을 얻었다.
많은 국민들은 청문회의 거물 증인들을 논리적으로 공박하던 젊은 노무현 의원을 크게 주목하고 공감했다. 드디어 그가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소리치며 명패를 던지는 데 이르러서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광주 시민들을 학살토록 했다는 전 전 대통령을 대신 응징한 젊은 의원의 용기와 정의감에 통쾌함마저 느꼈다. 그것은 영화 속 인권변호사의 정의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명패 던지기는 ‘노무현의 저항정신을 상징했으며 한국 현대사를 바꾸는 신호탄’이었다고 평가된다. 부산 출신인 그가 호남의 신뢰를 얻는 계기도 되었다고 한다.
노무현 변호사, 노무현 의원의 ‘반 전두환 정신’은 2002년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그리고 오늘 1000만 명이 넘는 관객들이 그를 담은 영화를 보고, 감동케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필요할 경우 그토록 미워하던 전 전 대통령이 남긴 유산의 활용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이중성을 보여주기도 하는 이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언론탄압’이다.
전두환 정부는 1980년 12월 31일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높인다며 ‘언론기본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언론이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경우 문공부 장관이 정·폐간할 수 있도록 했다. 언론 침해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는, 정부가 인사와 예산을 장악한 언론중재위원회를 만들었다. 국민들은 갖가지 행패를 부리는 사이비 기자들에게 넌더리를 내고 있던 터였다. 허나 성낙인 서울대 법대 교수는 언론기본법을 “권위주의 시대의 대표적 악법의 하나”로 표현했다. 언론에 대한 국민감정을 정부가 악용했기 때문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매일 보도지침을 내려보내는 등 철저한 언론탄압을 했으나 언론사들은 언론기본법이 두려워 저항하기 어려웠다. 선진국 어느 나라도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정부가 나서 높이지 않는다. 언론의 자율규제에 맡길 따름이다. 최대권 전 서울대 법대 교수는 “언론기본법은 소위 제5공화국하의 언론탄압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이에 대한 옹호의 여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은 채 폐기되었다”고 말했다.
노태우 정부는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언론기본법은 없앴다. 그러나 다른 이름의 언론 법을 만들면서 정부가 언론에 간섭하고 개입하는 본질을 바꾸지 않았다. 반론권 집행 기구인 언론중재위를 그대로 둔 것이 대표적인 경우. 그것은 언론에 피해를 본 국민들에게 신속한 대응 수단을 준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반론권이 생성된 프랑스와 한국 반론권이 본뜬 독일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런 기구는 없다. 법원이 반론권을 다룰 뿐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필연적으로 정부의 개입을 가져온다며 반론권조차 거부했다.
노무현 정부는 2005년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높인다며 ‘언론중재법’을 따로 만들어 언론중재위를 강화했다. 전두환 정부의 나쁜 유산을 없애기는커녕 확대 발전시킨 것. 그것도 모자라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언론중재위에 제소하는 첫 기록을 세웠다. 5년간 15건이나 제소하고, 공무원들에게 특혜를 주면서 제소를 독려했다. 그와 공무원들은 국민 세금으로, 국민을 위해 만들었다는 기구를 마음껏 활용하며 언론을 괴롭혔다.
그는 못된 언론을 손보기 위해 전 전 대통령의 방법을 빌리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항변할지 모른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노 전 대통령의 정의감인가. 그는 일관된 도덕과 원칙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자신의 감정에 따라 언제든지 자신만의 정의를 창조했다. 그리고 타고난 연기력과 말솜씨로 그것을 대중의 정의감으로 만들었다. 그 이중성에 김 전 변호사가 속았다는 것이 아닌가. 필자도 한때 속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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