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회사에 파견돼 일하는 대기업그룹 전산 계열사 협력업체 직원 A 씨는 요즘 출근할 때 종이 공책을 꼭 챙긴다. 회의를 하거나 업무 지시를 받을 때 손으로 공책에 필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회의 시간에 메모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전산 분야에서 10년 넘게 일한 A 씨는 공책 필기가 낯설기만 하다. 얼마 전까지는 노트북 PC를 갖고 다니며 메모할 내용을 기록하거나 회의 때 나온 내용을 프로그램에 반영했다. 하지만 신용카드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발생한 이후 불가능해졌다. 회사 측이 ‘보안 강화’를 이유로 협력업체 직원들의 노트북에 쇠사슬을 매달아 책상과 연결한 뒤 자물쇠로 잠가 버린 것이다. “자물통에 묶인 노트북을 보고 있으면 서글퍼요. 내 손에 수갑을 채운 느낌이랄까요.”
또 다른 금융사의 전산 외주업체 직원 B 씨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회사 측이 정보 유출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며 인터넷 접속을 아예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B 씨가 맡고 있는 웹 디자인 업무는 고객정보 같은 민감한 데이터를 다룰 일도 없고 업무 특성상 인터넷 접속이 필수이지만 회사 측은 “예외는 없다”며 B 씨의 인터넷 접근을 막고 있다. B 씨는 이 회사에서 스마트폰조차 이용하지 못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업무 처리가 늦어진 B 씨는 결국 집에서 밤새우며 일을 처리하다 2∼3시간 눈을 붙이고 출근길에 나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요즘 전산업계에서는 세 사람만 모이면 금융당국을 성토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문제가 터지면 일단 막고 금지하는 게 당국의 대책이어서 부작용이 곳곳에서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불법 개인정보가 유통될 우려가 있다고 텔레마케팅(전화 영업)을 아예 막아 버리는 당국의 ‘묻지 마식 관치금융’이 금융권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다. 텔레마케팅 금지 조치는 언론이 부작용을 집중적으로 제기해 철회됐지만 현장에서는 이보다 더 심한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 대한 국정조사를 벌이고 있는 의원들의 ‘황당’ 발언도 문제다. 7일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의 국정조사에서 한 의원은 카드업체 관계자에게 “비밀번호와 카드 뒷면 세 자릿수 인증번호(CVC 코드)가 유출되지 않았다는 것을 왜 언론에 알리지 않았느냐”고 몰아 세웠다. 1월 초 사태가 터진 뒤 모든 언론이 ‘비밀번호와 CVC는 안 털렸다’고 보도했는데 말이다. 또 다른 의원은 며칠 전 새로 취임한 사장에게 “왜 인사상 책임을 지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해당 카드사 사장은 이미 물러난 상태였다.
카드정보 유출 사태가 터진 지 한 달이 됐다. 쇠사슬로 PC를 묶어 놓은 금융회사, 대통령의 지시가 나오자 ‘늑장’ 현장점검에 나선 금융당국, 한 달이 지나도록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의원들을 바라보며 국민들은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다. 문제의 원인을 차분히 분석하고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는 모습을 우리는 언제쯤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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