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평인]윤지충 시복과 제사 금지령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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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충은 어미가 죽었는데도 효건(孝巾)만 쓰고 상복(喪服)도 입지 않고 조문(弔問)도 받지 않았다. 신주(神主)는 불태우고 제사는 폐했다.” 조선 사회는 정조 15년(1791년) 전라도 진산군(지금은 충남 금산군 진산면)의 한 가난한 양반 집에서 일어난 이 ‘해괴한’ 사건으로 충격에 휩싸였다. 누가 봐도 명백한 천주교와 유교의 정면충돌이었다. 윤지충은 참수형을 당해 한국 천주교회사 최초의 순교자가 됐다.

▷그는 체포된 후 관아의 신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갑니다. 죽은 이는 집에 남을 수 없고 또 남아 있어야 할 영혼도 없습니다. 위패들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닙니다. 그저 나무토막에 불과합니다. 제가 어떻게 그것들을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여겨 받들 수 있겠습니까.” 선교사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 자생 천주교인으로서의 자의식이 놀라울 뿐이다.

▷제사 금지는 중국에서 비롯됐다. 처음 중국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은 관용적 선교 방침에 따라 제사를 금하지 않았다. 나중에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제사를 우상 숭배로 보기 시작했다. 오랜 논란 끝에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최종적으로 금령을 내렸다. 1790년 베이징 교구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 신자들의 문의에 그 결정을 전했다. 그로부터 채 1년도 못 돼 제사 금지가 불러일으킨 기나긴 박해의 첫 희생자가 나왔다.

▷1874년 첫 한국천주교회사를 쓴 프랑스 신부 샤를 달레는 제사 금지에 대해 “조선 국민 모든 계층의 눈을 찌른 것”이라고 탄식했다. 교황청은 1939년에 가서야 제사를 허용했다. 지금까지의 시복시성은 모두 기해박해(1839년)와 그 이후의 순교자가 대상이었다. 한국 천주교 역사 연구의 대가였던 고 최석우 신부는 생전에 제사 금지의 희생자였던 신유박해(1801년)와 그 이전 순교자들을 현양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번 교황청의 시복 결정에 신유박해와 그 이전 순교자들이 대거 포함된 것은 천주교의 경사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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