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하정민]검은 주먹과 오바마 바나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2일 03시 00분


하정민 국제부 기자
하정민 국제부 기자
1968년 10월 멕시코시티 여름올림픽 육상 남자 200m 시상식.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미국의 흑인 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칼로스가 미국 내 인종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미 국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치켜들었다. 은메달을 딴 호주의 백인 선수 피터 노먼도 흑인운동을 상징하는 배지를 상의에 부착해 두 선수를 지지했다. 세상을 놀라게 한 ‘검은 주먹(Black-gloved fist)’ 사건이다.

1950, 60년대만 해도 미 남부에서는 화장실, 상점 심지어 병원에서도 흑인과 백인의 출입구가 달랐다. 미 흑인 민권운동의 시초인 ‘로자 파크스’ 사건도 버스의 흑인과 백인 자리 구분 때문에 일어났다. 이런 시대였으니 ‘반란’을 일으킨 스미스와 칼로스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두 사람이 일체의 정치 행위를 금지한 올림픽 헌장을 위반했다며 즉각 메달을 박탈했다. 호주로 돌아온 노먼도 백호주의(白濠主義)를 앞세운 여론의 비난에 시달렸고 1972년 뮌헨올림픽에는 아예 선수로 뽑히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세 선수의 행동은 전 세계의 지지와 각성을 이끌어냈다.

약 40년이 지난 지금 적어도 겉으로는 올림픽에서 인종차별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참가자는 없다. 인종차별 논란 자체가 금기이기 때문이다. 2012년 런던 여름올림픽에서 인종차별 발언을 한 스위스 축구선수 미셸 모르가넬라와 그리스 육상선수 불라 파파크리스투는 바로 퇴출됐다. 2020년 도쿄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경쟁도시 터키 이스탄불을 겨냥해 이슬람 비하 발언을 한 이노세 나오키 전 도쿄 도지사도 국제적 지탄을 받았다.

그런데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은 다르다. 성화 점화자인 러시아 피겨 여왕 이리나 로드니나(65)는 지난해 9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부부에게 바나나를 들이미는 합성사진을 리트윗해 파문을 일으켰다. 바나나는 겉이 노랗고 속은 희어 ‘백인을 따라하는 유색인’을 비하할 때 쓰인다. 피겨 페어스케이팅에서 금메달 3개를 딴 스포츠 영웅이라도 그를 성화 점화자로 낙점한 러시아 정부의 인식은 안이하다.

국내 스포츠계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몇몇 프로 야구단이 전지훈련을 했던 미 애리조나 주를 찾은 한 케이블방송의 여성 아나운서는 “(얼굴이 타) 깜둥이가 됐다”는 트윗을 올려 역풍을 맞았다. 지난해 한화이글스의 김태균은 롯데자이언츠의 흑인 투수 유먼을 두고 “까만 얼굴 탓에 그가 마운드에서 웃으면 흰 치아와 공이 겹친다. 그래서 공을 치기 힘들다”고 말해 국가인권위원회 경고까지 받았다.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는 세상에서 그나마 공정한 경쟁을 통해 승부를 가린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스포츠는 그 어떤 정치 행위보다 더 이상적이고 공정한 정치성을 요구받는다. 올림픽 3연패를 했건 국가대표 4번 타자이건 인종차별 논란을 낳은 선수가 비판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다.

하정민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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